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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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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8장 추억과 상처 사이(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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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었다. 한때 싫건 좋건 서로 총을 겨누고 싸웠던 적이었음에 분명한, 그러니까 철천지 원수에 가까웠을 월맹군과 베트콩들의 용맹무쌍한 이야기를 아무런 저항없이, 심지어는 감탄까지 하며 둘러보게 하는 곳이 바로 구찌 관광이었다. 그것도 자기 돈 내고 망고 주스를 빨면서....
그게 전쟁이었다. 죽은 자들만 애통하고, 상처받은 자들만 혼자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전쟁인지도 모른다. 나머지는 모두 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멀쩡하게 살아간다. 한국에서 온 아저씨들은 베트콩 전사의 모형인형 옆에서 브이(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는다.

관광 코스 중의 하나였던 땅굴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뚱뚱한 미국 아저씨 때문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낙엽으로 위장된 굴 입구는 겨우 한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는데, 먼저 시범으로 가이드가 선보인 다음 <작가모임>의 여자 문인 한 사람이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리고나자 가이드가 미국 아저씨에게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사람 좋게 생긴 노랑머리 아저씨는 고개를 한번 갸우뚱 하더니 카메라를 부인에게 맡겨두고 구멍 속으로 먼저 하반신을 밀어넣었다. 그럭저럭 성공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이었다. 뚱뚱한 배가 입구의 턱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아저씨는 팔을 밖에다 걸치고 힘을 주어 나오려고 용을 썼지만 한번 걸린 배 부분이 도무지 빠져주질 않았다.


아저씨는 벌게진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고, 부인도 웃었고 둘러섰던 구경꾼들도 웃었다. 이런 일에 익숙해져 있을 가이드가 나서서 빼주는 척 했지만 그리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구경꾼들 중 젊은 패들이 나서서 팔을 끌어당기고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힘을 주고서야 겨우 미국 아저씨는 땅굴 입구의 구멍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다들 큰일이라도 한 양 아저씨를 향해 장난스럽게 박수를 보내었다.
즐거웠다. 승자의 평화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이다. 승자인 그들은 당당하였고, 여유있었다. 가이드도, 표 파는 아가씨도, 현장 안내를 맡은 군복 차림의 아저씨도 모두 여유가 있었다. 그들에겐 그 모든 것이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 평화는 그들이 치른 지난한 싸움과 수많은 희생에서 얻은 값진 선물이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라크 전쟁처럼 미국에게 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평화는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패자의 평화가 될 것이었다. 당당함 대신 비굴함이, 여유 대신 초라함이 자리 잡고 구찌터널 베트콩의 소탕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할 것이었다. B52 전폭기가 전시되고, 영어로 하는 설명에 다들 귀를 기울려야할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곳엔 대한민국은 없었다. 1964년부터 1973년 종전까지 8년 6개월 동안, 연 31만 명이 참전하여, 4,624명의 전사자를 내고 15,000 명의 부상자와 숱한 고엽제 희생자를 내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한국군의 자취는 없었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구찌 터널을 돌아보는 동안 하림은 내내 그게 아쉬웠다.
승자도 패자도 아닌 전쟁, 그저 들러리였을 뿐인 전쟁에서 삼촌은 목숨을 바쳤고, 대신 조국 대한민국은 경제 건설의 토대를 그들의 피값 대신 받았던 것이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보릿고개 넘어가던 시절이었다. 전쟁은 늘 정의와 이념의 가면을 쓰고 등장하지만 어떤 전쟁도 정의와 이념만으로 이루진 것은 없었다. 누구에 의해, 어떤 명분으로 이루어지든 정복은 정복이다. 그리고 정복은 강도짓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한씨 아저씨의 ‘실종 사건’ 이 벌어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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