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건 대통령 이후 26년만에 처음으로 ITC 권고에 거부권 행사…보호무역주의 논란 거세질 듯
[아시아경제 권해영 기자]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예상을 뒤엎고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애플 제품 수입 금지 권고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미국 대통령이 ITC의 판정을 뒤집은 것은 26년만에 처음으로 노골적인 자국 기업 감싸기에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논란이 거세질 전망이다. 삼성전자도 애플과의 협상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오바마 대통령의 위임을 받은 무역대표부(USTR)는 3일(현지시간) 아이폰, 아이패드의 미국 수입 금지를 주 내용으로 하는 ITC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마이클 프로먼 USTR 대표는 "표준특허는 프랜드(FRAND) 문제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며 "미국 경제의 경쟁 상황, 소비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이 같이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이어 "삼성전자는 법원을 통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ITC는 지난 6월 애플이 삼성전자의 3세대(3G) 무선 통신 표준특허를 침해했다고 판정하며 아이폰4, 아이폰3GS, 아이패드2, 아이패드 등의 수입 금지 결정을 내렸다. USTR이 ITC의 권고를 받아들이면 5일부터 아이폰, 아이패드 일부 모델의 미국 수입 금지 조치가 시행될 예정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ITC의 권고를 거부한 것은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삼성전자 메모리칩 관련 소송에서 거부권을 행사한 이후 26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당초 예상을 깨고 오바마 대통령이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애플이 자국 기업이라는 점, 의회와 기업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미국 공화당, 민주당 상원의원 4명은 USTR 대표에 서한을 보내 삼성전자의 표준특허를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의원들은 "표준은 서로 호환되는 제품이 경쟁하고 소비자가 이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며 "(USTR이 ITC의 권고를 받아들인다면) 표준 제정 작업에 다수가 폭넓게 참여하는 것을 막고 표준 제공에 따른 산업과 소비자의 이익을 제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이동통신사 AT&T, 버라이즌 등도 오바마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애플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애플은 최근 '디자인 바이 애플 인 캘리포니아(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캘리포니아에서 애플이 디자인했다)'라는 새로운 슬로건을 자사 제품에 새기면서 미국 기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미국 고용 창출이 거의 없다는 지적이 쏟아지자 최근 맥 프로의 미국 생산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애플이 미국 기업이라는 점과 의회, 기업들의 전방위적인 압박이 더해지면서 미국 행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선택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미국 행정부가 노골적으로 애플 편을 들면서 지난해말부터 진행중인 양사의 협상도 삼성전자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오바마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직후 애플은 "이번 이정표가 될 사안에서 미국 행정부가 혁신을 지지한 것을 환영한다"며 "삼성이 이런 방식으로 특허를 남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USTR이 ITC의 수입 금지 명령을 파기한 것은 유감"이라며 "ITC의 결정은 삼성이 신의성실한 자세로 협상에 임했고 애플은 협상에 임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반영한 판정이었다"고 밝혔다.
권해영 기자 rogu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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