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은정 기자] 단단히 토라졌다. 일곱 살 아들 얘기다. 로봇 놀이를 하자고 떼를 쓰는 아들에게 "그래"라고 말하자마자 요즘 인기 있는 로봇 만화 시리즈 장난감 4개를 들고 나온다. 아들은 "내가 주인이니 제일 힘이 센 장난감이 내 것"이라고 외친다. 그런 후 나머지 3개를 인심쓰듯 내밀면서 "이것 다 합쳐 공격해도 못 이길거에요"라며 활짝 웃는다. 그런데 아들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주인에 대한 배려없이 엄마의 권위(?)만을 내세우며 "내가 더 강해", "말을 들어야 놀아줄거야"라며 윽박지른 결과다. 결국 20분도 채 안돼 "주인은 난 데…"라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하자"고 말을 건넸지만 들은 척 만척이다. 주인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엄마한테 삐쳐도 단단히 삐친 모양이다.
거실에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다 문득 개성공단 사태와 관련 "주인은 분명 입주기업인데 전혀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한 데스크의 말이 떠올랐다. 대접받지 못하는 주인의 설움이 이렇겠구나 싶었다.
11일 오전 76명의 개성공단 기업인이 오매불망해왔던 공장을 찾았다. 전날(10일) 1차로 개성공단을 방문한 기업인들에 이은 2차 방문단이다. 이들은 이날 주어진 8시간 동안 설비ㆍ기계와 원부자재를 점검하랴, 재사용이 가능한 원부자재 등 반출 리스트를 작성하랴 어느 때 보다도 바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앞서 방문한 이들 역시 똑같은 일정을 소화했다. 지난 100일간 개성공단의 방문만 손꼽았던 이들에게 이날 주어진 일정, 8시간은 짧아도 너무 짧다.
하지만 이들이 이 일정을 소화하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눈물겨웠다. 지난 4월3일 북한의 일방적 출경금지 조치에 이어 5월3일 우리측 인원의 전원 철수 후 입주기업인들은 설비가 녹슬어 간다며 애태웠지만 공단에 갈 수 없었다. 우리 정부는 입주기업들의 방북 신청을 신뢰프로세스의 구축이 먼저라며 허락하지 않았고 북은 이렇다할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지 않은 채 재가동부터 할 것을 요구했다. 팽팽하게 대립하는 남북 정부 사이에서 입주기업인들이 벼랑 끝으로 몰렸다며 호소했지만 이들에 대한 배려를 찾긴 어려웠다. 긴박한 상황에선 주인을 따지기 보다 권위자의 얘기를 들어야한다는 식이었다. 물론 정치체제가 다른 남북이란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다.
그러나 남북은 모든 것을 잃어야 할 처지에 놓인 주인의 심정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개성공업지구법에 따르면 투자기업들은 50년간 토지 사용권, 건물은 영구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적어도 이 기간만은 남북 정부가 아닌 입주기업인이 개성공단의 주인인 것이다.
100일 만에 개성공단을 찾으며 '감개무량'하다며 활짝 웃었던 주인들이 다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차 남북실무회담이 성과없이 끝났기 때문이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처럼 한 번 놀란 경험이 있는 이들은 별것 아닌 발언에도 격렬하게 반응할 수 있다.
개성공단은 남북 경제 협력 사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때문에 기본을 바로 잡아 신뢰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주인인 기업인에 대한 배려가 가장 기본이 돼야 하지 않을까.
이은정 기자 mybang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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