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1993년부터 추진해온 질(質)경영 패러다임은 그동안 한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의료, 품질, 디자인 등에 일대 변화를 몰고 왔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싸구려 제품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이젠 삼성, LG 등 대기업 제품 하면 '프리미엄'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됐다. 신경영이 양(量)에 방점을 찍었던 기업 경영 전략을 질(質)로 수정하는 변화를 주도한 것이다.
■ 미국 LA서 삼류 취급 받는 삼성 제품 보고..'질 경영' 결심=1980년대 한국 주부들 사이에선 일본 기업이 만든 '코끼리 밥솥'이 단연 인기였다. 일본에 가면 꼭 코끼리 밥솥을 사와야 한다는 말이 널리 회자되던 시기였다. 코끼리 밥솥처럼 메이드 인 저팬은 사람들 사이에 품질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다. 반면 메이드 인 코리아는 '싼 값에 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품질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삼성제품의 위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93년 이 회장은 미국 LA에 있는 백화점과 디스카운트스토어를 둘러보고 충격을 받았다. 국내에서 일등 상품 취급을 받는 삼성 제품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곳에선 삼류 제품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니, NFC 등 외국 브랜드에 밀려 찬 밥 신세를 당하고 있는 삼성의 현주소는 이 회장의 '신경영' 구상에 불을 댕겼다.
이후 이 회장은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로 삼성그룹 핵심 경영진들을 불러 모은다. 그는 이 자리에서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고 말한다. 이른바 신경영 선언이다.
변화와 함께 내놓은 화두는 질 경영이었다. 이 회장은 "불량 생산을 범죄로 규정한다"며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경영을 과감히 버리고, 질 위주로 간다"고 못 박았다. 아무리 품질을 강조해도 임직원들 사이에 변화의 기미가 안 보이자 1994년 구미공장에서 '불량제품 화형식'을 열기에 이른다. 10여명의 직원들이 500억원 규모의 무선전화기 키폰 팩시밀리 등을 해머로 부수고 이를 다 태워버린 것이다.
삼성의 질 중시 경영은 비단 가전제품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환자 중심의 이상적인 병원을 만들겠다'는 꿈을 안고 1994년 11월9일 문을 연 삼성의료원은 낙후된 대한민국의 병원 현실을 바꿔 놨다.
술과 화투가 판치고 망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 돈이 오가는 폐습이 횡행한 곳이 1990년대 초 대한민국 병원의 현실이었다. 여기에 변화의 메스를 들이댄 것이 바로 이 회장이었다.
"낙후된 병원이 환자 입장에서 얼마나 큰 고통인지 너무도 잘 알면서 그대로 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기업의 총수로서 할 일이 못된다."
이후 삼성의료원은 보호자 없이도 환자가 전문적인 보살핌을 받도록 했으며 국내최초로 처방전, 진료기록부 등을 전산화한 의료 전산 시스템을 도입한다. 삼성 병원의 선진화 노력에 일부 병원은 반발하기도 했지만 곧 다른 병원들도 삼성 시스템을 뒤따라하기 시작했다.
■ 국내 기업들 너도나도 '삼성 배우기 열풍'= 삼성의 질 경영 행보는 국내 다른 기업들이 품질 경영을 강화하는 도화선이 됐다. 화장품, 식품, 전자 업계는 1993년 경영 화두로 '품질'을 꺼내 들었다.
국내 1등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당시 대평양)은 1993년 고객서비스의 새로운 장을 연 '무한책임주의'를 선언하고 품질 관리에 본격 나서게 된다. 야쿠르트는 그해 경영 목표를 '품질경영 강화의 해'로 정했으며 LG(당시 럭키금성)도 '질 위주의 경영'을 선언한다. 지난 1999년 회장에 취임한 정몽구 현대차 회장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제1의 경영목표 역시 '품질경영'이다.
삼성경영을 배우는 것은 비단 기업뿐만이 아니었다. 정부도 '삼성배우기'에 동참했다. 통일부는 삼성그룹의 사내 인트라넷인 '마이싱글'과 삼성경제연구소의 홈페이지를 집중적으로 벤치마킹한 바 있다. 통일부 내에 통일포털이라는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감사원은 삼성경영 가운데 성과급 제도와 연봉제에 관심이 많다. 외교통상부 외교안보 연구원은 삼성의 경영전략 가운데 인재양성 프로그램에 눈독을 들이고 해외주재원 전문가 양성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삼성인력개발원에 손을 내밀었다. 기업, 정부 가리지 않고 삼성배우기에 나선 것이다.
■ '디자인에 혼을 담아라' 디자인 경영 선포=질 경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할 무렵, 이 회장은 디자인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이 회장은 한남동 자택에서 라디오 카세트 CDP를 요리조리 살피다가 버튼 조작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디자인에 삼성의 혼이 전혀 담겨있지 않다고 느꼈다.
디자인 혁신 없이는 질경영이 이뤄질 수 없다고 판단한 이 회장은 1996년 신년사에서 '21세기 기업경영에서는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웨어 경쟁력이 최대 승부처'라고 선언한다.
비서실은 이 같은 이 회장의 디자인 경영 철학에 바탕을 둔 후속 조치들을 속속 내놓았다. 비서실에 디자인 관련 전담 인원을 두고 삼성 디자인상도 제정했다.1996년 삼성디자인학교(SADI)가 세워지고 2001년 삼성전자엔 최고경영자(CEO) 직속의 디자인경영센터가 설립됐다. 현재 디자인경영센터엔 1200여명의 디자이너가 일하고 있으며 런던 상하이 도쿄 로스앤젤레스(LA) 밀라노 뉴델리 등에 디자인센터를 두고 있다.
삼성의 디자인 강화 전략은 2007년부터 서서히 빛을 보기 시작한다. 2007년 미국 IDEA와 독일 iF Product 부문에서 각각 1개, 26개의 디자인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 열린 'iF 디자인 어워드 2013'에선 세탁기와, 프린터ㆍ복합기 2개 제품이 금상을 받은 것을 비롯해 모두 39개 제품이 본상을 휩쓸었다. iF 디자인 어워드는 산업디자인 부문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디자인상이다.
■메이드 인 삼성, 메이드인 코리아의 위상 변화=지난해 일본에서 '삼성을 알고 삼성을 넘어서자'는 논의가 한창이었다. 일본기업 따라잡기에 열을 올린 1970~1980년대 한국 사회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일본의 '삼성 배우기'는 소니 등 일본 기업들이 부진의 늪에 빠진 것과는 달리 삼성전자가 글로벌 IT 강자로 부상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품질경영을 앞세운 신경영을 강도 높게 추진한 결과 삼성은 휴대전화를 비롯한 TV와 반도체 분야에서 기적에 가까운 '성장'을 기록했다. 1993년 30조원에 못 미치던 매출은 2012년 380조원을 달성하며 13배나 뛰었고 그룹 시가총액도 같은 기간 8조원에서 338조원으로 44배나 늘어났다. 전 세계 고용인원은 1993년 14만명 에서 42만명 으로 증가했다.
역대 월드베스트로 꼽힌 삼성전자 제품은 총 9개이며 이 가운데 8개가 신경영 선포 이후 각종 시장조사기관 집계 결과 1위에 올랐다. 점유율 기준 스마트폰(2012년ㆍSA), 스마트카드 IC(2006년ㆍABI), 모바일 CMOS 이미지센서(2010년ㆍTSR)와 매출액 기준 TV(2006년ㆍ디스플레이서치), 모니터(2007년ㆍIDC), 낸드플래시(2002년ㆍ아이서플라이), 모바일AP(2006년ㆍSA) 등이 세계시장을 석권한 주인공이다.
김민영 기자 ar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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