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전자제품 회사의 서비스센터로부터 직원의 친절도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조사원은 '매우 친절' '조금 친절' '조금 불친절' '매우 불친절' 네 가지 항목을 주고는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그에게 물었다. "혹시 '지나친 친절'은 없나요?" '고약한' 고객의 황당한 질문에 조사원이 당혹해했지만 나의 심술궂은 반응은 그 조사가 서비스센터에 들어섰을 때 내가 받았던 과분하다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의 환대, '고객님'의 털끝 하나, 옷자락 하나, 손길 하나라도 높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한 태도, 그래서 급기야 고객 자신은 물론 고객의 모든 것을 높이려는 듯 '5000원이십니다' '이쪽이십니다'라고 하는 그 극단의 존대에 내가 느꼈던 불편한 심정을 자극했었기 때문인 듯하다. 혹은 이를 바로잡겠다는 비장한 사명감 같은 것이 주제넘게 발동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는 지금 아마 친절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그래서 사물에까지 존대를 붙임으로써 동서고금에 전례가 없는 친절의 지극한 성취를 이뤄 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커피숍에서, 백화점에서 이 '극진한' 대접을 받을 때마다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른 무엇보다 이는 국어 파괴행위이며, 문법의 파괴이며 수천년간 우리의 역사에서 생성 발전시켜 온 존대의 원리를 파괴하는 기괴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친절 과잉'을 두고 볼 수 없는 더 큰 이유는 그 너머에 있다. 이 친절 과잉은 친절과 존대라기보다는 인간의 자기비하이기 때문이다. 친절의 이름으로 섬기는 것은 고객이 아닌 고객이 가진 것, 고객의 재물, 고객으로부터 받을 것이니, 이는 결국 사람이 아닌 물신을 모시는 것이며 그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다. 게다가 이 물신의 신앙은 섬세한 매뉴얼과 규정에 의해 극히 표준화돼 있다.
그러나 알 수가 없다. 이렇듯 '감사합니다'가 넘치고 '사랑합니다'가 넘치는데 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삭막해져 가는가. 실은 이 '제복을 입은 듯' 표준화된 친절과 존대는 진짜 사랑과 감사의 결핍의 다른 얼굴은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 덜 친절해지면 어떨까. 조금 덜 고객을 존경하고 덜 사랑하고, 그래서 남은 친절과 존경을 고객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면 어떨까. 친절을 자제함으로써 진짜 친절해지면 어떨까.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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