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유수경 기자]언젠가 영화 ‘파이란’의 후기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엔 영화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평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후반부의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아름다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상당히 ‘미남’이었다고. 그의 ‘파리지엥’(parisien, 프랑스 파리 사람) 같은 모습을 보니 왠지 영화에 대한 매력이 배가되는 것 같다는 말이었다. 물론 ‘어불성설’이고, 여담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최근 ‘고령화가족’으로 돌아온 송해성 감독을 만났을 때, 일전의 그 후기가 떠올랐다. 오랜 기간 영화 현장에서 ‘미남 감독’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터. 하지만 그는 이런 평들을 민망하고 쑥스러워했다.
“연극영화과 출신이지만 배우는 해 본 적이 없어요. 찍히는 것도 싫어해요. 교수님이 (배우 해보라고) 꼬드기긴 했는데….(웃음) 처음부터 대학 들어갈 때 감독이 꿈이었기 때문에 생각이 없었어요. 더 대단한 이가 많잖아요.”
손 사레를 치며 웃음 짓던 송해성 감독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로 접어들자 사뭇 진지해졌다. 이번 영화는 투자 받기가 힘들어서 잠시 접어 둘 생각까지 했던 작품. 그래서 애착도 더욱 크다.
“‘나중에 할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 영화는 좀 다른데도 불구하고 흔히 가족이라고 하면 ‘뻔하고 쉬운’ 작품들을 많이 생각하잖아요. 게다가 ‘송해성? 작품이야 좋겠지만 흥행이 되겠나’ 하는 걱정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감독은 영화를 유쾌하게 그려낼 자신이 있었다. 충분히 상업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현실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포기’라는 단어를 떠올리던 순간, 박해일의 전화 한 통이 그를 구제했다. 극중 인모(박해일 분)를 살린 엄마(윤여정 분)의 전화와도 같았다.
“낮술 했는데 ‘고령화가족’ 얘길 하면서 ‘이걸 내가 해보면 안 되겠나’ 묻더라고요. 저는 눈이 번쩍 뜨였지만 잠시 누르고 ‘잘 생각해. 지금은 충동적으로 그럴 수 있지만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했죠.(웃음) 그러니까 해일이가 ‘앞으로 나이를 더 먹으면 이런 역할을 못 할 거 같다’고 하는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진행이 됐죠.”
‘고령화가족’이 만들어진 건 전적으로 박해일의 덕분이라던 송해성 감독. 그는 모든 이야기의 기본은 ‘리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깊은 바닥에 집어넣은 ‘판타지’도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가족이 있다는 것도 판타지일 수 있어요. 그러나 영화 속의 가족을 통해서 또다시 살아가는 희망을 느끼게 하잖아요. 그런 게 사실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송해성 감독은 “영화를 보는 두 시간은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내 인생의 두 시간이다. 최소한 그 시간이 쓸데없이 허비되면 안 되는 것 아닌가”라며 “어떤 영화를 찍었을 때 남의 인생을 뺏는 거라면 내가 뭘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심각한 영화는 아니지만 웃고 떠들다가 뭔가를 건져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단다. 모든 상업영화가 마찬가지지만 그런 영화를 찍고 싶었고, 그렇게 찍었다고 위안한다.
‘고령화가족’을 연출하면서 송해성 감독 본인도 변했다. 구원에 대해 심각하게 다루는 영화는 아니지만 스스로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됐다며 눈을 크게 떴다. 사실 그는 부정적인 사상이 많이 내재돼 있는 사람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영화를 통해서 바뀌었어요. 원작에서는 엄마가 죽어요. 그런데 ‘왜 죽여야 하지? 이렇게 행복하고 잘되는 거를 지켜보는 것도 좋은 건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완전히 변화한 거죠.”
지금까지 송해성 감독의 영화 여섯 편중에는 해피엔딩이 없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고민하느라 이렇게 행복하게 찍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이번에는 배우들과의 에너지 넘치는 현장을 온전히 즐겼다. “절대 잊지 못할 영화”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눈빛이 참으로 따뜻해보였다.
유수경 기자 uu84@
사진=송재원 기자 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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