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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장승욱의 '이사갈 때 보니'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9초

사전만 쉰세 권/할 말 없다/할 줄 아는 말 물론 없다


장승욱의 '이사갈 때 보니'


■ 사전 몇 권이야 예전에는, 가정상비약처럼 구비하는 것이지만, 그 권수가 저 정도 되면 무섭다. '국어사전을 베고 잠들다'라는 책을 펴낼 만큼 우리말을 캐고 살려내고 바로잡았던 이 방면의 선수이다. '할 말 없다'는 말은, 맥락으로 보면 사전만 그렇게 들이 파헤친 자신이 딱해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 많은 사전들 속에도 자신의 할 말이 들어 있지 않다는 언외언(言外言)과 불립문자(不立文字)를 말하기도 한 것이다. '할 줄 아는 말 물론 없다'는 '할 말 없다'를 더 심각하게 변주한다. 공부를 아무리 해도 여전히 어눌(語訥)을 벗지 못했다는 겸양어이기도 하지만, 사전은 사전일 뿐 세상 앞에 발언하는 법까지 가르쳐주진 않았다는 얘기를 행간에 숨겼다. 쉰세 권은 그의 사전 보유량이기도 하지만, 그의 인생 햇수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승욱은 1961년생으로 작년에 작고했다. 올해 살아 있었다면 쉰세 살이다. 그렇게 놓고 보면 제목의 '이사갈 때 보니'는 저승으로 이사가는 일을 섬뜩하게 품는다. 그는 한때 나와 같은 직장의 동료였던 편집기자였다. 그는 인생 쉰두 권을 읽은 뒤 책을 덮었지만, 나는 그 쉰세 권을 펴들고 있는 셈이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술자리의 흥이 동하면, 문득 일어나 산울림의 노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불렀다. 그런데 창법(唱法)이 김창완스럽지 않고, 장사익에 가까웠다. 원곡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에서 '깔고'를 딱 한 번 까는 것이었는데, 그는 '깔고깔고깔고!'로 거푸 세 번씩이나 깔면서 거친 신명을 표출했던 기억이 난다. 오래전 일인 데도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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