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의 신곡이 화제입니다. 그럴 만합니다. 앨범 가운데 어느 한 곡 빠지지 않습니다. '가왕'이라는 호칭이 허세가 아니다 싶습니다. 신인 아이돌의 이름이 익숙해질 만하면 이내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시대, 데뷔 45년차 가수의 이런 존재감은 참으로 고맙고도 귀합니다.
몇 달 전 데뷔한 신인이면서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새로운 스타, '창조경제'는 어떨까요? 어떤 관료 한 분이 창조경제가 우리의 50년을 이끌고 갈 화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반짝 아이돌이 아니라 조용필이라는 주장인 셈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열심히 따라가던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으니, 과거의 추격형 성장 대신 우리 스스로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체질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런 변화를 창조경제라고 부른다면 창조경제는 우리의 미래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창조경제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고 자의적입니다.
며칠 전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의 트위터와 페이스북에는 격앙된 글들이 돌아다녔습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창조경제를 가속화하기 위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교육을 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에 대해 어떤 사회과학자가 우수한 소프트웨어가 만들어지려면 코딩 능력보다는 인문학적인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은 인문학적 사고가 뛰어나도 코딩 능력이 없으면 좋은 소프트웨어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입장이었고, 급기야 인문사회학자들이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을 표피적으로 이해하면서 가볍게 말한다는 불만까지 터져 나왔습니다. 엔지니어 시절, 모니터에 코를 박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 코딩 실력을 저주한 경험을 가진 저로서는 공감 가는 불만입니다.
하지만 불만은 반대쪽에도 있습니다. 최근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을 융합시키고 여기에 창조성을 접목하여 새 시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창조경제가 정의되자,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한숨을 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십여 년 동안 반복되어온 '융합기술, 정보통신 융합'과 뭐가 다르냐는 탄식이지요. 창조경제가 그저 몇 개의 흥미로운 융합 제품을 일컫는 데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이런 분들의 의견입니다. 사회 전체가 인문적 감수성으로 넘치도록 하고, 사회문화적 창의 자원이 마음껏 분출되도록 해야 비로소 진정한 창조경제가 달성된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창의적인 제품을 만들라고 재떨이를 날리는 조직에서 결코 진정한 창의성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들마다 시각이 다릅니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와 인문사회학 분야에서 창조경제를 보는 시각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창조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목적은 같아도, 이를 위해 해야 할 일의 목록과 우선순위는 다른 것이지요. 그러나 제각기 목소리 높이기 경쟁을 벌이지 말고 함께 차분하게 토론해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창조경제에 대한, 구체적인 추진 방향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꼭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자면, 문ㆍ이과 구분을 제발 좀 없애면 좋겠습니다. 교육 분야의 이해관계와 현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서 쉽지 않다고 합니다만, 고등학교 저학년 때, 아니면 중학교 시절에 자신의 세계를 한정 짓고 다른 분야에 대한 몰이해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만드는 제도는 심각한 사회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좁은 울타리 안쪽만 알면 된다고 가르쳐놓고, 뒤늦게 왜 우리나라는 창의적인 융합이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것은 참담하기 짝이 없는 희극이 아닐까요?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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