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하림은 이장 운학의 천연덕스런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 글쎄, 여기 화실 주인장되는 윤아무개랑.....”
그리고나서 다시 소주팩을 기울여 잔에 찰찰 넘치게 부은 다음, 입에 갖다 대고 홀짝거리며 떠보기라도 하듯 딴엔 형사처럼 가늘게 눈을 뜨고 하림께를 쳐다보았다. 하림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게 갖다 붙여놓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긴 여자가 살던 빈 화실에 정체불명의 젊은 사내가 가방을 메고 떡 하니 나타나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오해를 사려면 사고도 남을만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하림으로 보자면 억울해도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기와 윤여사로 말하자면 손톱만큼도 오해 받을 짓을 해 본 적도 없었을뿐더러 그럴 가능성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삼자의 눈에까지 그렇게 비치길 바란다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주제넘는 바람인지도 몰랐다. 모든 일은 남녀상열지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옛말도 있거니와 단순히 생각하자면 그렇고 그런 관계로 엮어지는 게 세상살이의 일반적 법칙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 윤여사 말입니까?”
하림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놓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리고보니 무어라 대답하기도 곤란했다. 친구인 황동철로부터 소개를 받았다는 이야길 하려니, 또 황동철이 누구인지 설명해야했고, 그렇다고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이야기 해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은 난, 윤여사랑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아무 관계도 없다고 해도 무방한 사이지요. 근데 제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 작업실이 필요했었는데 마땅한 작업실이 없어 헤매던 중 우연히 아는 친구를 만났죠. 황동철이라고 나랑 군대친구랍니다. 근데 우연히 만난 이 친구와 아는 사람이 바로 윤여사였고, 마침 윤여사가 나의 딱한 사정을 듣고나서 그러면 시골 고향에 자기 빈 화실이 있으니 가서 있으려면 있으라 해서 그렇게 오게 된 것입니다.”
하고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횡설수설 떠들어대었다. 어차피 알아들을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어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또한 그게 사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날 눈 내리던 동묘 앞 흑돼지구이집에서 나누었던 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도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가서 있으려면 있으라.... 그래서 오게 되었다, 이 말이지요?”
운학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 꼴이 또한 우스웠다. 어수룩한 표정으로 보아 하림의 말 내용 보다는 그저 홀짝거리는 소주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금세 한 팩을 다 비우고 두 번째 팩을 뜯고 있었다.
“암튼 잘 왔소. 나야 사실은 장선생이 누구인지, 또 윤아무개랑 어떤 관계인지 아무런 신경 쓸 일도 없지만, 암튼, 잘 왔소.”
잘 왔소, 잘 왔소, 하면서도 ‘윤아무개랑 어떤 관계인지 아무런 신경 쓸 일도 없지만’, 이라고 할 때의 그의 목소리에서는 이상하게 얼핏 가시 같은 게 느껴졌다. 그는 갑자기 침울해진 얼굴로 탁자 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듬성듬성 턱에 난 수염과 입가를 따라 진 깊은 주름이 지금까지의 모습과 달리 무척 예민하고 신경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보면 아까 한때 그녀를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는 그의 말 속에 남들이 모르는 숨겨진 사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은 하셨수?”
이윽고 그는 다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린 듯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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