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X조선해양, 채권단에 자율협약 신청
샐러리맨서 재계 13위 오너로
위기마다 '결단'으로 이겨내
글로벌 금융위기가 치명타
[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지난달 29일 오후 3시. STX팬오션 입찰에 한곳도 참여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은 강덕수 STX그룹 회장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12조원에 달하는 그룹의 부채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해소할 기회였지만 덩치가 크고 업황부진이 이어지고 있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 것 인가." 마지막 보루로 여겼던 STX팬오션 매각이 무산되면서 그의 생각도 복잡해졌다.
12년전 회사를 인수할 당시의 상황이 오버랩됐다. 쌍용중공업의 '월급쟁이'였던 강 회장은 2001년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자 외국계 펀드로부터 회사 지분을 인수했다. 20억여원의 전 재산을 털어 쌍용중공업 주식을 사들였다. "회사를 살리는 게 먼저"라는 소신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커오던 회사가 12년만에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내린 결론은 12년과 다르지 않았다. "종업원 6만여명에 달하는 협력업체 1400곳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3만5000명에 달하는 종업원들의 고용은 유지하자." 결국 그는 자신의 경영권은 제약받으면서 종업원들을 살릴 수 있는 방안을 택했다.
강 회장이 주력계열사인 STX조선해양에 대해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지금보다 강도높은 자구책을 마련할 테니 회사가 정상적으로 영업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고뇌어린 결단이다.
샐러리맨에서 시작해 부실기업의 최고경영자를 거쳐 재계 13위 그룹 오너가 되기까지, 강덕수 STX그룹 회장에 따라붙는 수식어는 '승부사'였다. 수십년간 몸담았던 회사가 퇴출위기에 몰리자 그는 전 재산을 털어 부실기업을 직접 사들였다. 이후 회사를 쪼개고 다른 기업을 인수합병(M&A)하며 사세를 확장, 십여년 만에 외형을 수십배로 키웠다.
사업의 두 축으로 삼은 조선과 해운은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지만 지금에 와서는 부메랑이 됐다. 2004년 인수한 범양상선(현 STX팬오션)을 국내 최대 벌크선 업체로 키웠고, 이 회사가 운용할 배를 STX조선해양이 만드는 사업구조는 2000년대 중반 조선ㆍ해운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2008년 이후 아직껏 이어지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그룹 전체에 치명타를 입혔다. 전 세계적으로 물동량이 급감하면서 해운과 조선 모두 곤두박질치면서 당장 자금운용이 원활치 않게 됐다. 원활한 자금운용이 생명인 조선ㆍ해운업체를 경영하는 강 회장으로선 다시 한번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야심차게 인수했던 STX OSV 지분을 되팔았고 신사업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STX에너지도 해외업체에 넘겼다.
계열사 지분매각만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12월 주채권은행이자 회사의 2대 주주인 산업은행과 만나 주력계열사 가운데 하나인 STX팬오션을 매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지난달 29일까지 진행된 공개경쟁입찰에서 인수의향서를 낸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강 회장의 이번 결단이 다시 한번 묘수로 작용할지는 미지수다. 채권단이 신청을 받아들인다면 큰 부담인 금융권 채무가 1년간 늦춰지지만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게 현실이다. '손해를 감수하고 배를 짓는다'고 할 정도로 지금은 제값을 받고 배를 만드는 곳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계는 일러야 올 하반기가 돼야 발주량이 서서히 늘면서 배값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과거와 달리 선박건조 대금 가운데 대부분을 막바지에 지급하는 헤비테일 방식도 자금난을 부채질했다. 강제성이 없는 채권단 자율협약이지만 당장 신용등급이 내려가는 등 시장이 보내고 있는 불안한 시선도 재무부담을 가중시킬 것으로 보인다.
최대열 기자 dychoi@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