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에게 어느 지혜보다 더 깊은 '무지(無知)의 지(知)'의 깨달음을 가르쳐 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신탁으로 새겨져 있었다는 그리스 델포이 신전에는 또 다른 경구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중용을 지켜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그리스 정치 철학의 요체가 되었다.
그런데 '중용'은 동양의 도학에서도 정수랄 수 있는 것이니-물론 그 의미가 똑같지는 않지만-그렇다면 그리스와 공자 간에 시공간을 넘어서는 교감이라도 있었다는 것인가.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그러나 전혀 묘할 게 없다. 인간의 지혜, 보편적 덕성은 그 근원으로 깊이 들어가면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 지성의 합일이며 진리의 바탕이다.
동서양의 현인들이 함께 칭송하고 추구했던 최고의 덕성 중용은 그럼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사실 중용의 '중(中)'은 어려울 것 없는 말이지만 그만큼 속화돼 있다. 감히 그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알기도, 안다고 해도 얘기하기는 더더욱 어렵지만 그 의미의 한편을 겨우 기웃거려 본 바로는 '중'이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으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도 기대지도 않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은 지나침을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옛 선인들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경계했던 모양이다. 동양의 의서가 슬픔은 물론 기쁨도 지나치면 심신을 해친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치다.
엊그제 우연히 봤던 백호 윤휴의 시에서도 지극함을 경계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비운의 죽음을 맞은 그는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봄 구경 언제가 좋은가/꽃은 피지 않고 풀이 돋으려 할 때이지.'
왜 꽃이 활짝 피어 절정에 달할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일까. "천지 만물의 이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봄 경치의 완상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저 높은 곳으로 자꾸 올라가려만 하고 한없이 밝은 쪽으로만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특히 이 이치를 새겨야 할 이들이 있다. 재물에 재물을 더하려 하고, 광명에 광명을 더하려는 이들. 그러나 그를 높이 들어 올린 것이 결국 그를 떨어뜨릴 것이다. 높이 비상만 하려다가 한순간 추락하고, 양지만을 걸으려다 어둠으로 떨어진 이들을 우리는 지금 적잖게 보고 있다. 이 봄날, 델포이의 신탁은 우리를 여전히 깨우쳐 준다. 지나치면 결국은 잃게 된다는 것을.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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