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42

시계아이콘01분 33초 소요
숏뉴스
숏 뉴스 AI 요약 기술은 핵심만 전달합니다. 전체 내용의 이해를 위해 기사 본문을 확인해주세요.

불러오는 중...

닫기
글자크기

짐승들의 사생활-2장 혜경이 42
AD


집에 들렀다 다시 차를 몰고나와 혜경이 미장원으로 가니 열한시가 가까웠다. 간판불은 꺼져 있었지만 안의 불은 환하게 비쳤다. 이층 영산철학원의 푸른 페인트칠한 창문 사이로도 불빛이 은은히 새어나오고 있었다.
혜경이 딸 은하와 사는 집은 미장원에서 백여미터 떨어진 연립주택 삼층이었는데, 하림은 가능한 그 집이 아닌 미장원에서 혜경을 만났다. 그녀가 사는 집에서는 왠지 죽은 그녀의 남편 곱슬머리 양태수의 냄새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죽은 지 이년이 다 되었으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 집에서 둘이 만나면 괜히 누가 째려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늦었네?”
혜경이 미장원 싱크대에서 수건을 빨고 있다가 돌아보며 말했다. 연통을 고정시켜놓은 철삿줄에도 수건을 비롯한 빨래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응.”
하림은 건성으로 대답하고는 난로 있는 데로 갔다. 예전에 연탄을 떼던 것을 혜경이 가스 땜에 머리가 아프다고 하여 작년에 하림이 장작난로로 바꿔준 것이다. 몇 개비 넣지 않은 것 같은데도 열이 후끈후끈 나서 추운 날에는 그만이었다. 하림은 습관처럼 난로 아래를 열어 재가 차있나 살펴보았다.


“배고파? 먹다 남은 만두 있는데 데워줄까?”
혜경이 말했다.
“아니. 됐어. 차나 한잔 마시지, 뭐.”
하림은 난로 위에 놓인 주전자 뚜껑을 열어보며 말했다. 김이 연기처럼 올라와 얼굴에 감겼다. 하림은 잔에다 일회용 녹차 티백을 넣고 물을 부었다.
“조금만 기다려. 거의 다 되어가. 은하가 워낙 늦게 잠자리에 드는 바람에....”
“천천히 해.”
“방에 들어가 있던지.”
“응.”

하림은 뜨거운 차를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반쯤 남았을 때 미장원에 붙어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찻잔를 탁자 위에 두고 웃옷을 벗은 다음, 자리에 누웠다. 두 사람이 겨우 누울까 말까한 좁은 공간이었다.
어수선한 방안 풍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린 액자는 동남아 어딘가를 여행할 때 사 온 것인지 야자수 나무와 코끼리가 있고, 그 뒤로 넓은 바다가 보였다. 조잡한 액자와 낡은 소파와 탁자와 전기 밥통과 큰 여행용 가방 등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작은 방에 누워 있으니 오히려 하림의 마음이 편안해졌다. 어린시절 다락방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다닐 땐가 한번은 다락방에 올라가서 숨어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적도 있었다. 아이를 찾아 엄마는 온동네를 다 돌아다녔다고 한다. 저녁 때까지 내처 잠을 잔 하림은 그제야 고양이처럼 눈을 비비며 다락방에서 내려와 학교에 가야하니 밥을 달라고 하여 온 식구들을 웃겼다고 한다. 아침인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보면 행복을 위해선 지상의 방 한칸이면 충분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어린왕자’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왕자’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사는 집은 어떻게 생겼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들 우리 집은 얼마짜리라고 답한다. ‘어린왕자’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 담쟁이 넝쿨이 쳐져있는가, 장미꽃은 피어있는가, 강아지와 고양이와 닭은 살고 있는가, 발코니는 있는가, 하는 등의 질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부동산 투기로 멍든 이 세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우주의 낯선 별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하림은 팔베개를 한 채 스르르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