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혜경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야, 하림아! 우리 저기 가보자! 옛날 우물 있던 자리....”
그리고 깡충깡충 달리기 시작했다. 베이지색 바바리코트 자락과 하늘색 스카프가 바람에 날렸다. 바람결에서 어렴풋이 혜경의 머리카락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아주 멀리서 날아온 냄새처럼 아찔했다.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있던 하림도 급히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우물은 학교 교사 뒤에 있었다. 예전엔 아주 깊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겨우 어른 키 두어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둘러서서 물도 마시고, 얼굴을 비추어보기도 했던 바닥은 지금 은행잎을 비롯한 낙엽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다. 패랭이 꽃이나 코스모스 같이 꽃잎이 가지런한 꽃을 따서 던지면 낙하산처럼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곤 하던 기억이 났다. 하림이 혜경을 따라 한참동안 우물 밑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멀리 교무실 쪽 창문이 드르륵 열리며 누군가 커다랗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야, 늬들 뭐하냐? 둘이서 연애해? 빨리 들어와!”
동기 회장인 준호 목소리였다. 까르르르 웃는 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때 왜 그랬을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연애해?’ 하는 소리에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던 것은..... 그날, 가을빛 흐르는 오후의 낡은 초등학교 교정에서 동기동창 모임을 하는 동안 하림은 내내 보이지 않는 시선으로 혜경의 그림자를 쫒았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족구를 하고, 여자들은 피구를 하고 했다. 피구를 할 때 여자들 수가 모자랐기 때문에 금 밖에서 공을 받아서 던져주는 쪽은 남자들이 했다. 준호 마누라 영숙이 뚱뚱한 몸을 날리며 이리저리 뛰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꽃이 피곤 했지만 그때에도 하림은 온통 혜경이 모습뿐이었다. 하림은 혜경의 옆, 빈자리가 오랫동안 자기를 위해 비워져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 문예반 시절 여름날 계곡에 놀러갔던 일이 떠올랐다. 따갑던 여름 햇살과, 검은 숲, 맴맴거리던 게으른 매미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대꼬챙이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만일 그럴 기회가 다시 온다면 이제는 정말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그 소망대로 서울에서 하림은 다시 혜경을 만났다. 혜경은 그때 마악 딸 은하를 데리고 ‘은하헤어살롱’을 열 무렵이었다.
하림은 겨우 엉덩이만 끼는 작은 그네에 앉아 우중충한 회색빛 겨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날 혜경이 만난 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우연이라면 우연일 것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일지 몰랐다.
시계를 보았다. 곧 은하가 나올 때가 되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양태수의 아이를 자기가 기다리고 있다니. 태수 선배가 만일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면 뭐라 할까. 고맙다고 할까, 아니면 화를 낼까.
놀이터에는 자기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마중 나온 엄마들이 여기저기 차를 대어놓고 기다리는 게 보였다. 원래 아이들은 싣고 다니던 노란 미니버스가 있는데 운전수 아저씨가 마침 감기에 들어 꼼짝 할 수 없다고 하여 부득불 학부모들이 와서 데려가야 했다는 것이다.
어린이집 문이 열리면서 아이들이 와글와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림은 그네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갔다.
“은하야! 여기...!”
은하가 나타나자 하림이 손을 높이 들어 깃발처럼 흔들었다.
은하는 하림 쪽을 향해 깡충깡충 토끼처럼 달려와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엄마는....?”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