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대기업의 회의실. 중요한 딜을 위해 양측의 임원을 중심으로 실무자들이 앉아 있었다. 화기애애하게 덕담으로 시작된 회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무렵, 이 회사를 방문한 쪽의 분위기가 심상찮아졌다. 자기들끼리 잠시 할 얘기가 있다고 하더니 자리를 일어나 버렸다. 딜은 바로 깨졌다. 어떻게 된 것일까. 범인은 이면지였다. 비용절감을 위해 이면지 사용을 일상화한 이 회사는 상대방 임원과 팀장급에게는 새 종이에 칼라 프린트본을 줬지만 수행한 실무진에게는 이면지에 프린트된 내용을 줬다. 문제는 이면지 내용. 하필 이면지에는 다른 경쟁사와 딜을 하고 있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당해 보이지만 몇해 전 실제 일어난 일이다. 경제가 어렵다고 하면 기업들에서 가장 쉽게 나오는 정책이 이면지 사용이다. 몇푼 안돼 보이지만 1년치를 모으면 적지 않은 돈이 되고, 금액자체보다 한정된 자원을 재활용한다는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권장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같은 쥐어짜기식 정책이 습관적으로, 전시적으로 행해졌을 때다. 역시 이면지 사용을 적극 강조하는 또 다른 대기업에서는 임원들에게 나눠줄 회의 자료가 이면지가 아닌 새 종이에 인쇄된 것을 뒤늦게 발견, 회의 직전에 서둘러 이면지에 다시 자료를 인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다 보니 이면지를 찾느라 시간이 지체되는 일도 가끔 생긴다고 한다.
요즘 금융투자업계가 어렵다. 지수만 보면 1900선을 오르내리는데 죽는 소리가 웬말이냐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하루 거래대금은 코스피와 코스닥을 합쳐 5조원 이상 되지만 절반 이상이 온라인으로 이뤄지다 보니 정작 증권사들에 떨어지는 몫은 거의 없다. 증권사들의 온라인수수료는 0.015% 수준. 1조원 거래가 일어나야 1억5000만원이 수수료로 떨어진다. 그나마 새로 론칭한 스마트폰 수수료는 공짜도 많다.
브로커리지 일변도에서 벗어나겠다며 서로가 육성하겠다고 나서는 IB쪽도 저가경쟁의 혈전장이 된지 오래다. 최근 1조6000억원대 한화생명 주식 매각 주간사 선정에는 수수료 0.01%를 써낸 증권사 컨소시엄이 승리했다. IB 수수료가 HTS 수수료보다 더 낮아진 것이다. 1조원대 기업공개(IPO)로 관심을 모은 SK루브리컨츠 주관사 선정에서도 저가 수수료 입찰이 논란이 됐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증권사들도 지점을 줄인다, 인력조정을 한다 하면서 몸집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업계를 대변하는 금융투자협회도 이같은 흐름에 동참한다며 연말 명예퇴직 실시를 앞두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연차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보통 부서장급 고참 직원들의 경우, 연차수당만 한달치 월급에 육박한다. 인건비 비중이 적지 않은 금융투자업계 현실에서 비용절감 효과가 적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연차수당을 지급하지 않은 비용절감 효과와 부서장 등 고참직원들의 업무공백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렵다고 무조건 허리띠를 졸라매고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오겠지 하는 식으로는 급변하는 시장을 따라잡을 수 없다. 제로에 가까운 수수료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버티기로 일관하다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새로운 돌파구라고 추진하고 있는 헤지펀드 등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지난해부터 국회통과를 못하면서 제자리 걸음이다. 업계와 협회가 총력을 기울여도 쉽지 않은 난제들이 쌓여있다. 비용절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풍성한 먹거리를 찾는 것이다.
전필수 기자 phil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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