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동철의 그림살롱 114회 | 한국화가 한은주…‘꽃의 텔레파시’ 연작
찬연한 꽃들과 나비와의 그윽한 교감(交感). 일말의 가난, 젖은 목소리의 고해를 포용하는 저 관대한 꽃송이들은 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인가. 한은주 작가는 “비록 꽃잎 하나에 새로움과 기쁨의 마음을 드넓게 했다라고 듣는다면
크나큰 위안”이라했다.
기어이 만발했습니다. 은빛속살을 세상에 처음 드러냈죠. 꽃술을 꽃의 진수라 합니다. 봐주는 이 아무도 없지만 애수에 젖은 가을비 오던 밤 피었더랬지요. 바람이 붑니다. 꽃잎은 젖고 큰 소리로 당신을 부르지만 빗소리에 가늘게 떨릴 뿐입니다.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고통과 좌절을 향기로움으로 피워낸다는 것인데 그것이 당신의 진면목임을 압니다.
문득 그 시절, 어쨌든 겨울은 이겨나야 하지 않겠느냐며 솜이불 한 장을 던지듯 내놓으시던 등이 휜 대추나무 지팡이를 짚고 다닌 할머니를 잊지 못합니다. 그 매서운 이별의 말이 어찌 배려와 염려의 호통임을 몰랐겠습니까. ‘꽃처럼 살라’시며 한마디 툭 던진 그 말이 제 가슴에 꽂혀 일깨웁니다. 꽃이 지면 열매가 맺히는 것일까요. 민들레 하얀 털이 희망을 품고 바람에 나부낍니다. 당신의 무덤가 잡풀을 맨손으로 뽑다 아무래도 내년 봄엔 민들레 꽃밭이 노랗게 장관을 이룰 것만 같았습니다.
야트막한 강물이 무리지은 조약돌 언덕을 넘어설 때 재잘거리며 수다를 떠는 듯 소리를 냈지요. 자작나무 숲이 기다랗게 늘어선 강변길. 해질녘 물빛은 조금은 우울한 깊은 갈색으로 물들어 갔었죠. 그러나 그 짙어가는 물색을 바탕으로 환상적인 반전(反轉)이 있었으니 바람에 흔들리는 저녁 무렵의 코스모스였답니다. 언뜻언뜻 물에 비치는 노을빛과 하얗고 빨간 코스모스가 찰랑이며 수놓는 계절의 향연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숨결을 전하는 브람스 교향곡 2번인 ‘전원 교향곡’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대 앞에선 자꾸만 깊은 숨을 들이키게 됩니다. 가슴으로 담아야 감동하고 향기를 들여올 수 있다했습니다. 깊은 외로움의 그대를 우두커니 바라만 볼 뿐입니다만 황국(黃菊)의 빙긋 웃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굳게 입을 다문 채 남모르게 견딘 고뇌에 찬 흔적이 그대 향내임을 압니다. “굳이 해탈의 꽃 아니 되시면 또 어떠신가요. 가을이 깊어갈수록 백련암 뜨락에 고개 숙여 시들어가는 당신을 사랑하다가/나는 그만 초승달에서 떨어져 나뒹굽니다.”<정호승 시, 옥잠화>
누가 말해주지 않는데도 어김없이 피고 집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헤아릴 수 없는 긴긴 시간이랴. 한 자리에서 변함없이 언제 어느새 세월을 이겨내는 법을 다 익혔는지 참 궁금 하구요. 생각건대 늘 다소곳하게 미소 지음이 사랑받는 법이라면 이제부터 수줍어 볼까 합니다!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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