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레 아트페스티벌' 12일 동안의 축제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철공소 거리에 거대한 투명 에어볼이 나타났다. 에어볼 속에는 분장한 배우가 연기를 펼친다. 그러면서 100여m 거리를 에어볼을 끌고 전진한다. 신기한 표정으로 마을 주민들이 한 두명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배우가 다다른 곳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예술공장' 건물 앞.
거리에서는 지역민들을 만나고 공연장 '예술공장'에서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무용, 공연, 설치, 퍼포먼스가 한창이다. 그것도 장르와 장르의 경계를 허물고 한데 어우러진 실험적 축제로, 지난 22일부터 장장 10여일 동안 열리는 중이다. 지금 이곳엔 다양한 장르의 독립예술가들이 이곳 예술공장에 모여있다. 신진, 기성 할 것 없이 나이와 유명, 무명을 뛰어넘어 예술가들이 협동해 작업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물레아트페스티벌'은 지난 2001년부터 시작해 10여년을 이어오고 있는 지역기반, 복합예술 축제다. '물레'라는 축제명을 단 것은 2007년 문래동 철공장 거리로 이전하면서다. 6년 전까지 서울 이문동과 대학로 등지에서 '토요춤판', '즉흥춤판', '돌출춤판' 같은 '춤' 축제를 진행해 오다 이제는 퍼포먼스, 연극, 회화, 문학 등이 결합되면서 축제의 규모가 커져가고 있다.
이 축제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총감독으로 활동해온 무용가 김은정씨는 "이 축제가 '춤공장'을 시초로 10년 이상 이어져 왔다면, 올해는 거리 퍼포먼스의 동그란 에어볼처럼 모든 예술작업들이 하나 돼 수면위로 오르는 축제로 다시금 도약하자는 의미로 준비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이어 "중견, 신진 예술가들이 함께 공연을 준비하면서 교감하고 서로가 새로운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경험을 가지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 더욱이 이 같은 실험적인 축제는 국내 뿐 아니라 한국, 일본, 싱가포르, 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 7개국 40여개 팀도 참여해 국제적인 다원예술이 교류하는 장이됐다.
◆춤꾼과 배우가 하나의 무대에 서다= 무대 위에 두 명의 무용가와 한명의 배우가 있다. 조명위의 두 춤꾼은 사다리 뒤 배우가 던지는 대사에 따라 몸짓을 보이거나 춤을 춘다. 이들이 만들어 가는 작업은 말의 홍수로 가득 찬 세상에서 홀로인 것 같은 현대인의 외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섬, 마주보다'라는 공연이다. 세상에 흩어져 부유하는 인간이 바로 '섬'인 셈이다. 언어를 통한 소통의 한계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아니다"라는 배우의 대사에 따라 무용수들이 존재와 비존재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몸으로 표현하지만 쉽지 않다. "화를 낸다" 같은 일상적인 의미의 말도 막상 몸짓으로 풀어내니 조금 낯설다. 말의 한계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우리는 말로 진실을 걸러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만 언어가 가지는 한계성이 있는데 그것을 관객과 공감해보고 싶었다"면서 "말이 아닌 따뜻한 마음을 온몸으로 마주하고자 구성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열린 춤 공연에서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이상한 댄스 컴퍼니의 '관계의 톱니바퀴'도 대표작 중 하나다. 두 남자 무용수가 손을 뻗으며 붙잡고 있다. 다리는 한데 모아 세모 형태를 만든다. 두 무용수의 표정은 모두 죽어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 학교나 회사 등 여러 집단속에서 관계를 형성한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형성된 그 관계로 인해 개인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게 된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규칙과 제도에 따라 개인들이 속해있는 관계는 기계적이다. 이를 무용수들은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와 너, 사회의 문제를 '단편실험영상'에 담다= 예술공장 한 켠에는 비디오로 촬영한 10분 내외의 단편실험영상들이 7편 상영되고 있다.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내용의 영상들이지만 평소 인지했던 생각을 단번에 깨뜨리는 신선한 비디오아트였다.
재개발로 인해 폐허가 된 지역에서 죽은 새의 진액을 빨고 있는 파리와 놀이공원 내 장미꽃밭에서 여유롭게 꿀을 따는 벌의 모습이 동시에 영상에 담겨있다. 동일한 두 행위를 하는 곤충이지만 벌과 파리의 모습은 상반된다. 아름답고 추하다. 하지만 이 둘은 생존을 위해 하는 행동들일 뿐이다.
이 영상을 만든 작가이자 이번 비디오아트 기획을 담당한 안정윤씨는 "살기위해 똑같이 하는 행위들을 사람들은 선택해 달리 받아들이는데 그런 인간의 심리와 우리의 고정관념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었다"면서 "이번 그룹전은 개인을 넘어 사회인식과 제도에 대한 생각들을 연장해 볼 수 있도록 비슷한 작품들을 선정해 모아본 것"이라고 말했다.
안 씨의 작품은 사물이나 이미지를 클로즈업 한 것들이 많다. 속눈썹이 눈으로 들어가 안구 위를 떠다니다 스스로 빠져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영상도 접할 수 있다. 눈을 보호하는 속눈썹이 이물질이 되는 아이러니와 함께 거꾸로 느리게 재생시킨 애국가의 사운드도 넣었다.
이외에도 개발로 인해 지금은 사라져버린 골프연습장, 동대문운동장, 인천 배다리 지역, 서울 아현동 주택가 등지를 다니며 찍은 박용석 작가의 단편영상도 접해볼 수 있다. 해외 작가로는 네덜란드 출신 카테리나 페치올리(Caterina Pecchioli)의 작품도 있다. 수많은 개미들이 다니는 땅에 분필선을 그엇을 때 나타나는 개미들의 행동들을 짧은 영상에 담았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타의적으로 그어진 분필선을 넘지 못하는 행동패턴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국가나 영토의 개념, 통제와 같은 사회적 기제가 가지는 정치적 매커니즘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문래동과 문래예술공장= 원래 늪지대였던 문래동은 일제때 조선총독부가 늪을 매립해 방직공업 공장을 지었던 곳이다. 그 뒤 1970년도에는 수만 개에 달하는 철공소들이 밀집해 대표적인 수도권 공업지역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서비스업 위주의 산업변화로 철공소들은 수도권 외곽으로 이전했고 문래동 철공소들은 대부분 비어있다. 2000년대 들어 가난한 예술가들이 작업실을 찾아 입주하면서 예술 활동을 시작했고, 문래동은 예술가 마을로 변신했다. 한때 개발 바람이 불었지만, 이로 인해 예술가들이 연대해 대외적인 창작활동을 매진하는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이 동네는 예술가들의 창작촌으로 알려졌고, 시 차원에서도 문래예술공장도 지었다.
예술공장 내에는 국내외 예술가들이 입주해 레지던시 활동을 하며 작품을 만들고 교류하며 실험적이며 신선한 창작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일환으로 물레아트페스티벌은 이곳에서 6년째 열리고 있다.
축제는 내달 2일까지. 문의 070-8833-9171
오진희 기자 valere@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