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인 1596년 어의(御醫) 허준(許浚)은 선조 임금의 명을 받고 당대 최고 의사들과 함께 동북아지역의 의서에 기록된 의료 기술과 지식 등을 모아 체계적으로 집대성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학 관련 '국가 최대 프로젝트'인 셈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우리나라 보물 1085호 '동의보감 (東醫寶鑑)' 탄생 이야기다.
동의보감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선진국이던 중국의 의학문헌을 단순히 발췌 수록한 것이 아니라 의학 문헌을 총망라해서 독자적인 체계에 따라 정리하고 새롭게 해석했다는 점이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향약을 한글로 표기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모든 백성이 쉽게 의료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의료의 대중화를 꾀했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 한국 전통의학의 독자성을 이야기할 때 주로 동의보감 이후부터 시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편집에서의 우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동의보감은 내경, 외형, 잡병, 탕액, 침구편으로 구성돼 있다. 이는 기초의학에서부터 임상의학을 모두 망라하고 있으며, 임상 각 부분의 항목 배정에 있어서 환자들이 가장 많이 호소하는 병증을 우선적으로 배치했다.
여기에 자세한 설명과 함께 원인과 진단, 처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돋보인다. 민간요법까지 더해 실질적인 치료효과 향상을 꽤한 것도 눈에 띤다. 비록 400년 전에 만들어진 동의보감이지만 체계적이면서도 구체적이라는 평가는 지금도 한의과대학의 기본참고서로 쓰이는 이유가 된다.
조선 의학은 동의보감을 통해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동의보감 발간 이후 상당 기간 조선의 의사들은 이에 안주해 더 이상 괄목할 만한 발전을 만들어나가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서적들은 초판이 발간되고 나서 일정기간이 지난 후 내용을 수정 보완해 개정판을 내기 마련이다. 동의보감의 경우 이런 시도가 없었음에 후학들의 무능과 안이함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400년 만에 본격적인 동의보감 개정작업이 시작됐다는 점이다. 이른바 '신(新)동의보감 프로젝트'다. 국가 거점 연구기관인 한국한의학연구원이 국내 한의계의 학술 단체 및 전문가들과 함께 지난 7월4일 연구원 내에서 신동의보감 편찬의 출범을 알리는 제1차 신동의보감 편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국가주도형 한의학분야 편찬사업인 신동의보감 프로젝트는 동의보감을 전면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발간 후 400년에 걸쳐 축적된 한의학의 임상ㆍ과학적 성과를 반영하게 된다. 기초 한의학, 임상 한의학, 한국형 한의학의 세 분야로 나뉘어 앞으로 6년간 추진된다.
현재 동의보감 탄생 4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학술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2009년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일도 이런 사업 성과 가운데 하나다. 2006년부터 시작된 동의보감의 영역 작업도 내년에는 마무리될 예정이다. 2013년 산청에서 열리는 세계전통의약엑스포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맞아 벌이는 전통의학분야의 국제적인 축제다.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동의보감 사업은 한의학의 근간을 공고히 함과 동시에 한의학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전통의학 시장에서 한의학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특히 한의계의 뜻과 힘을 모아 400년 만에 시작되는 '신동의보감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은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최승훈 한국한의학연구원장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