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8일 미국 대법원은 현지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21세기 들어 가장 중요한 법률적 판단'을 내렸다. 오바마 대통령이 통과시켰던 '의료보험 의무가입법(PPACAㆍ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이른바 오바마 케어 법안이 '합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법안의 핵심 내용은 그동안 개인적 선택에 맡겨왔던 건강보험 가입을 법으로 의무화하는 것으로 이를 맹렬하게 반대해온 미국 보수파들은 즉각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명분은 '국가가 개인의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빼앗을 권리가 없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의료보험 의무가입제를 도입할 경우 추가되는 천문학적 비용을 중상층 이상의 부자들이 상당부분 부담하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별로 한 일이 없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취임 후 3년 넘도록 전력투구해서 만든 이 법안까지 위헌으로 판결이 난다면 오바마 대통령은 대선국면에서 그야말로 바닥없는 추락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판결이 나오기 전 수많은 언론들은 위헌판결을 예상했다. 9명의 대법원 판사 가운데 5명이 확고한 보수파라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합헌으로 판결이 났다. 위헌판결을 자신있게 예측했던 미국 방송사들의 법률전문가들이 비공식적으로 사과를 했을 정도로 뜻밖의 판결이었다.
위헌소송을 제기한 보수파 입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반란표'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으로부터 나왔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그동안 노골적으로 오바마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보수성향 인사였기 때문에 그의 이번 '합헌'판결은 대선을 앞둔 공화당에게는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는 비통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공화당 부시 대통령의 지지로 대법원장이 된 사람이다. 그런 그가 민감한 대선정국에서 오바마 대통령을 결정적으로 구해주는 판결을 내린 것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한마디로 '부럽다'는 것이다. 누가 임명했든, 자신이 속한 이념적 성향이 무엇이든 그에 앞서 법률가로서의 소신을 확실하게 펼 수 있는 정치적 풍토와 문화가 부러운 것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비선출직인 대법관은 국민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률에 대해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점, 정치적 문제는 정치권으로 되돌려보내는 신중함이 로버츠 대법원장의 '반란표'의 기초가 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미국의 이번 의료보험 의무가입 판결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떠오른 또 하나의 생각은 올해로 서른 다섯 살,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된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장래였다. 미국에서 의료보험 법안이 정치적 쟁점이 된 것은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한 저소득층과 노령층을 더 이상 재정이 감당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1989년부터 의료보험이 전 국민을 포괄했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되면서 향후 의료보험에 소요되는 재정수요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전 국민 건강보험이 고령화 시대에도 지속 가능하려면 비용감축과 재정확충을 위한 노력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 진단을 통해 철저하게 비용을 줄이고 동시에 장기적인 재정확충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절실한 노력은 초등학교부터 건강교육, 영양교육을 시켜서 병원을 찾는 환자 수 자체를 줄이는 것이다.
과도한 의료보험 재정적자 때문에 선거 때마다 정치적 쟁점이 되고 사법부의 판결까지 기다리는 미국의 사태를 우리가 답습하지 않으려면 이 같은 노력은 빠를수록 좋다.
홍은주 한양사이버대 시니어비지니스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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