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 한국영화의 기대주, 충무로 블루칩 등 요란한 세간의 칭찬과 달리 이제훈은 좀처럼 들뜨지 않는다. “스스로는 크게 달라진 건 없어요. 이런 변화나 사랑을 피부로 느끼고 있어서 감사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대단한 일을 했다거나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지는 않아요.” 인터뷰 내내 곰곰이 생각한 뒤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는 그에게서 매번 한 치의 모자람 없이 기태가 되고 승민이 될 수 있었던 동력의 크기를 가늠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 해 독립영화의 구원투수였던 <파수꾼>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을 만들어내던 기태에게서 소심하고 쭈뼛거리는 <건축학개론>의 승민을 예상할 수 없었던 것처럼. 물론 짧은 첫 등장만으로 강인함과 광기를 동시에 보여준 <고지전>의 일영에게서 유약하고 뒤틀린 <패션왕>의 재혁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매번 작품을 들고 세상에 나올 때마다 전혀 다른 이였으면서도 이제훈에게 여전히 연기는 “목마르고”, “조금 더 뛰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연기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연기에 목이 말라있어요. 분명히 좋은 작품을 만나서 사랑을 받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조금 더 뛰어야 한다,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그는 오히려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 안에서 힘을 얻고 자유로워진다. <건축학개론>에서 GEUSS 티셔츠를 입고 서연을 만나기 위해 “엄마는 할 수 있어”라며 신속한 세탁을 종용하는 애드리브는 현실의 이제훈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유머다. “승민이라면 어떻게 할까?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인물에게 감투를 씌어주면 어떤 시도든 겁이 없어져요. 이제훈으로서 웃겨 보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은데 배역으로서 빠져들어서 그 상황을 이끌어보라고 하면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장면 하면서 스스로 웃기기도 했는데 그런 게 제가 연기를 하는 힘인 것 같아요.” 자신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가 승민도, 재혁도 아닌 온전히 이제훈으로 돌아가는 시간은 “남들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을 정도로 소중한 영화들을 볼 때다. 다음은 그가 깊은 밤, 불을 끄고 헤드폰을 쓰고 방 안에서 혼자 맞이하는 행복한 시간을 채워주는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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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패밀리 맨> (The Family Man)
2000년 | 브렛 래트너
““사랑이냐 일이냐”라는 이분법적인 어리석은 질문에 꼭 대답을 해야 한다면 지금 현재는 일이라고 답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지만요. 그런데 <패밀리 맨>을 보면 현재 있지도 않는 사랑을 택하고 싶어져요. 결국 그게 전부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어느 날 삶이 통째로 바뀐 남자가 있다. 성공을 위해 달리다 사랑을 놓쳐버린 잭(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주어진 다른 인생은 전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따뜻하다. 아이들을 재우며, 개를 산책시키며 소박한 모임을 가지며 다시 삶을 꾸려갈 힘을 얻는 잭의 이야기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손색없다.
2. <인 굿 컴퍼니> (In Good Company)
2005년 | 폴 웨이츠
“개인적으로 토퍼 그레이스라는 배우를 참 좋아하는데 <인 굿 컴퍼니>에서 그의 매력이 십분 발휘되는 것 같아요. 영화도 심플하고 세련된 이야기의 구성에 감정도 깔끔하게 떨어져요. 그런데도 이상하게 다시 보고 싶게끔 만드는 따뜻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국내 개봉 당시 로맨틱 코미디물로 홍보되었지만 <인 굿 컴퍼니>는 성장영화다. 일에서는 승승장구하지만 삶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카터(토퍼 그레이스)가 나이 많은 부하직원 댄(데니스 퀘이드)과 그의 가족들과 함께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3. <라운더스> (Rounders)
1999년 | 존 달
“<라운더스>는 도박영화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머릿속에 박혀서 인생을 선택한 지금 이 순간을 흔들어버리는 대사들이 중간 중간 나와요.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어요. “우리는 운명에서 도망칠 수 없다. 선택?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이 우리를 선택하는 것이다.”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나요?”
도박사들에게 포커판은 전쟁터다. 전술과 전략으로 무장하는 것은 기본이고, 팽팽한 심리전까지 벌어지는 살벌한 그곳에 두 젊은이가 뛰어든다. 도박판의 스릴을 속도감 있게 살린 영화는 에드워드 노튼, 맷 데이먼이라는 명배우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4.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1995년 | 왕가위
“홍콩을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서 <중경삼림>을 더욱 아끼게 되었고, 볼 때마다 저를 위로해주는 영화예요. 홍콩은 타국이라고 하기에 제게 굉장히 편하고 익숙한 공간에 되어 버린 곳이기도 하죠. 또 그리운 곳이구요. 영화에서 등장하는 ‘몽중인’을 듣고 있으면 무언가 가슴 뛰는 희망이 샘솟는 것 같아요.”
<중경삼림>의 인물들은 사랑을 하고 있되 사랑을 가지진 못했다. 헤어진 연인과의 시간 속에서 여전히 머물거나 실연 후에도 여전히 그 사랑뿐이다. 그래서 사랑을 하고 있지만 더욱 외로운 이들의 어지러운 마음은 왕가위 감독의 휘청거리는 카메라 안에서 요동친다.
5. <노팅 힐> (Notting Hill)
1999년 | 로저 미첼
“거짓말 살짝하고 아흔아홉 번은 봤어요. 그런데도 매번 볼 때마다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모든 장면들이 저를 행복하게 하고 설레게 해요.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 두 주인공의 시퀀스뿐만 아니라 너무나 사랑스러운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저도 그 공간 안에 속해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한없이 빛나는 님과 평범한 나의 사랑, 흔히 왕자와 신데렐라로 대표되던 사랑 이야기가 할리우드 여배우와 노총각 서점 주인의 로맨스로 재탄생했다. 피어나듯 아름다운 시절은 지났지만 원숙한 매력이 돋보이던 시절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의 해피엔딩이 꽁꽁 언 마음을 노곤하게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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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성의 시작이 언제나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한 작품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고 해서 그게 영원할 수는 없고, 계속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야 지속되는 거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말 그대로 반짝 스타거나 혹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을 아끼고 숨기고 작품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보여주려고 하게 되는데 제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요. 패션쇼에 가거나 광고를 찍거나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사생활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작품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게 첫 번째인 것 같아요. 끊임없이 작품을 하고 지속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나중에 뒤를 돌아봤을 때 ‘참 열심히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살았구나’라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려온 궤적만으로도 앞으로를 더 기대하게 만드는 이제훈. 그 믿음에 신뢰를 더하는 힘으로 젊은 배우의 이런 다짐만한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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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지혜 seven@
10 아시아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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