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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대기업 오너와 그랜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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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대기업 오너와 그랜저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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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어느날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 와인을 마시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였다. 당연히 경영권 분쟁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갑자기 SK㈜ 회장 취임 당시로 경영권에 대한 화제를 돌렸다. "아버지(최종현 회장)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와 함께 회사를 이끌어 오신 회사 원로들이 저한테 회장을 맡으라고 하시더라구요. 경영권을 물려받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요." 이어 그는 현실론을 내세웠다. "회장 자리에 앉으면 제약이 많잖습니까. 놀기 좋아했거든요. 특히 그냥 대주주로만 남아 있으면 수천억원의 부자가 되는데 회장 자리에 앉으려하니까 1조원 이상의 빚쟁이가 되더라구요."


잠깐이었겠지만 그가 SK그룹을 물려받는 것을 두고 노는 것과 경영권 승계사이에서 고민했다는 얘기다. 최 회장이 1998년 9월 1일 SK㈜ 회장으로 취임했으니 이 때가 취임한 지 6년쯤 됐을 때다. 분식회계,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 등을 겪은 터라 회장에 오른 것을 후회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됐다. 그에게 물었다. "회장 자리에 오른 걸 후회하세요." "아니요. SK그룹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놀기 좋아했다던 6년전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최 회장의 얘기를 듣던 중 고등학생 시절 들었던 '그랜저 백수' 이야기가 오버랩됐다. 당시 인근 지역이 산업단지로 개발됐는데 정부의 토지보상으로 대규모 현금이 풀리면서 졸부들이 생겨났다. 우리는 이들을 '그랜저 백수'라고 불렀다. 부모가 농사짓던 땅이 수용되면서 적게는 수억원, 많게는 수십억원의 현금이 생기자 당시만 해도 최고급차인 그랜저를 타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칭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감보다는 우선 놀기를 좋아하는 젊은 시절 최 회장은 개인보다는 그룹, 부자보다는 빚쟁이, 대주주보다는 경영권이라는 도전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도전은 SK그룹을 급성장시켰다. 최 회장 취임 당시 37조4000억원에 불과했던 SK그룹의 매출은 지난해 말 기준 121조8000억원으로 3배 이상 몸짓을 키웠다. 재계 순위도 5위에서 3위로 두단계 상승했다. 물론 SK의 성장이 최 회장 개인능력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최 회장의 발로 뛰는 글로벌 경영이 오늘의 SK를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됐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최 회장이 대주주로만 남아 있으면서 수천억원의 부자가 되는데 만족하고 본인이 좋아하던 '놀기'를 즐겼다면 어땠을까.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은 가족 지배기업의 매출신장률 등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전경련은 국내외 사례를 통해 가족지배기업이 일반 기업에 비해 매출액 신장률과 주가상승률은 물론 고용창출율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특히 창업자 가족이 이사나 대표가 아닌 단순한 대주주에 머물 경우 경영실적은 다른 비가족지배기업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국내외 사례에 비춰 최 회장이 대주주로만 머물러 있고 경영활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오늘의 SK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가족지배기업인 삼성, 현대차, LG 등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대주주는 있지만 대주주가 경영에 참여하지 않음에 따라 이른바 주인없는 회사로 불리는 포스코, KT 등의 글로벌 경쟁력이 약화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대부분의 재계 2,3세는 혹독한 경영수업을 받는다. 젊은 시절이면 누구나 다 '그랜저 백수'처럼 맘껏 돈 쓰며 흥청망청 놀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긴 쉽지 않다. 잘 나간 삼성, 현대가에서도 도태되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기업이 오너 일가에 의해 지배되면서 부각되고 있는 오너 리스크가 사실은 기업 성장의 원동력인 셈이다. 대기업 오너, 가족지배기업은 돈이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는 편견보다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도전해 온 그들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은 어떨까.






노종섭 산업부장 njsub@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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