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리더 3.난세의 영웅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200여년. 계속되는 왕위다툼으로 중앙정부의 권력이 약화되고 관리들의 부정부패, 높은 세금, 계속되는 가뭄 등으로 백성의 삶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둑떼가 들끓던 시기 이 때 등장해 후삼국 통일의 패권을 다퉜던 두 영웅이 왕건과 견훤이다.
왕건, 권력 아끼고 매사에 공명정대…망해가는 신라 투항 기다려
견훤, 전투 나서면 부하보다 앞장서 공격…군사력 과신 민심못얻어
견훤(867년~936년)은 서기 900년 백제를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후백제를 건국했다. 이 후 궁예를 몰아낸 왕건(877년~943년)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견훤과 왕건 간에는 후삼국 통일을 위한 한 판 승부가 불가피해졌다.
견훤과 왕권이 처음 맞붙은 것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이다. 궁예 밑에 있던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영토인 전라도 지방을 공격, 금성군을 함락시키고 나주를 설치한다. 나주는 후백제가 중국 대륙과 교류하는 통로로, 견훤으로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왕건의 수군이 견훤의 수군보다 훨씬 강했다. 견훤은 수 년 동안 수군을 정비해서 나주를 공격한다. 그 때 철원에 있던 왕건은 궁예의 명령을 받고 함선 80여 척을 이끌고 출정한다.
왕건의 함대와 견훤의 함대가 맞붙은 곳은 영산강 하류다. 왕건의 부하들은 겁을 먹었다. 적군의 함선 수가 150여척으로 압도적으로 많은데다 왕(견훤)이 직접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왕건은 장수들을 모아 "전투의 승리는 화합해 한 덩어리가 되어 싸우는데 있지 수의 많음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전투로 견훤은 이 싸움에서 반수 이상의 군사를 잃고 자신은 작은 배로 허겁지겁 뭍에 올라 도망쳐야 했다. 유명한 덕진포 전투(909년)다.
이 후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 작은 세력 다툼은 자주 있었지만 한동안은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왕건에게 좋은 부채와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선물했다는 기록 등이 있다.
하지만 왕건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920년, 견훤이 신라 땅 합천을 공격하자 신라가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왕건이 원군을 보내면서 두 사람 사이의 불편한 관계는 다시 시작된다.
좀처럼 승패가 결정 나지 않는 전투로 인해 두 나라는 결국 인질을 교환하고 휴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6개월 후 후백제가 인질로 보낸 견훤의 처조카가 병으로 죽자 인질이 독살 당했다고 의심한 견훤은 다시 고려를 공격한다.
또 후백제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신라는 고려를 돕기 위해 구원병을 보낸다. 이에 격분한 견훤을 신라를 공격해서 서라벌(경주)까지 진격,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있던 경애왕을 살해한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황급히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정한다. 견훤은 이른바 공산대전(927년)인 이 전투의 승리로 경상도 서부 지역을 세력안에 넣게 된다.
하지만 고창전투(929년), 운주성 전투(934년) 등에서 잇달아 패해 견훤의 세력은 약해졌다. 또 왕위 계승을 놓고 집안싸움까지 벌어졌다. 견훤이 넷째 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맏아들 신검이 동생 양검, 용검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은 금산사에 유배한 후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석 달 후 견훤은 금산사를 탈출해 왕건에게 몸을 의탁한다. 왕건은 견훤을 상부(尙父)로 떠받들며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 즈음 나라의 운명이 기울대로 기운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자(935년) 견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역한 자식들을 처벌해 달라'고 왕건에게 청한다. 왕건은 친히 8만 70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후백제 정벌에 나섰고 그 대열에는 견훤도 함께 했다. 과거의 라이벌과 함께 자신이 세운 나라 정벌에 나서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연출된 것이다. 이 싸움에게 왕건의 군사는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고, 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다.
견훤의 군사는 초기에는 왕건의 군사보다 훨씬 강성했다. 견훤은 저돌적인 독선형으로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인물이었다. 전투에서도 군졸들에 앞장서서 진격하는 용장이었으며 너그러운 기분파 기질도 있어서 부하 장수들의 신망을 받았다. 그러나 망해가는 신라의 관리로 출발한 탓에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시대적 흐름을 따라가는 데도 미흡했다. 당시 사회는 지방 호족들이 중심돼 썩은 신라 왕조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분위기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었지만 견훤은 기강이 느슨한 신라의 군사 조직을 기반으로 세력을 얻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후에도 신라와 같은 제도와 방식으로 권력을 강화해 나갔다. 또 자신의 군사력을 너무 자만해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데도 미흡했다.
왕건은 견훤과 달리 때를 기다리며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지도자였다.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고 모든 일에 공명정대했으며 부하의 사소한 잘못은 눈감아 주고 적까지도 너그럽게 끌어안는 포용력을 발휘했다. 견훤을 받아들여 상부로 떠받든 것이나, 후백제를 정벌한 후 견훤은 아들 신검을 죽이려고 했지만 항복한 자는 죽일 수 없다면 그를 살려 준 것은 왕건의 통 큰 포용력을 말해주는 사례라 하겠다. 또 군사력으로 단숨에 신라를 쳐서 멸망시킬 수도 있었지만, 차분히 신라가 스스로 투항해 오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난세에 태어난 두 영웅 왕건과 견훤을, 한 쪽은 역사의 승자, 다른 쪽은 패자로 전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왕건의 통근 포용력과, 시대의 흐름을 주시하며 차분히 미래를 준비할 줄 아는 지도자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도 좋은 삶의 지혜가 될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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