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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최근 초등학교 야구부를 취재,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발간하는 월간 ‘더 베이스볼’에 기고하고 있다. 도신초, 성동초, 효제초에 이어 이달에는 사당초를 찾아 야구 꿈나무들의 훈련 과정을 지켜봤다. 학교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대체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이 9전 전승으로 금메달을 차지한 이후 야구부 문을 두드리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어느 학교의 경우 선수가 모자라 야구부가 아닌 아이에게 유니폼을 입혀 대회에 나섰기 때문이다. 국제 대회, 특히 올림픽에서의 좋은 성적이 관련 종목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몇 학교 되지 않지만 이들 야구부들은 서울 시내에서 야구를 꽤 잘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몇 고학년 아이들은 투구 스피드와 타구 속도가 중학생 수준이었다. 한때 배구에서 속공 플레이, 야구에서 변화구를 금지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 초등학교 투수들은 커브도 던지고 슬라이더도 구사한다. 물론 한 경기에 3이닝 이상을 던지지 못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고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아이들이 곧바로 눈에 띄었다. 공부하지 않는 운동선수에 대한 우려가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요즘 아이들은 반드시 정규 수업을 마치고 훈련한다. 따라서 모든 학교의 훈련 시작 시간은 오후 3시 이후다. 공부를 병행하는 엘리트 스포츠를 계속 키워가기 위해 유망주의 조기 발굴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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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러저런 이유로 유소년 스포츠에 대한 관심은 실질적으로 바닥을 치고 있다. 오는 26일부터 29일까지 경기도 일원에서 1만 7700여명(선수 1만 1700명 임원 6000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제41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대회 주관 단체인 대한체육회에서도 관련 부서 직원들 정도가 아닐까 싶다. 특히 올해는 제 30회 런던 하계올림픽이 열리는데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과 2012년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 스포츠팬들의 눈과 귀가 쏠려 있다. 연일 ‘대박’ 행진을 걷는 프로야구도 빼놓을 수 없다. 그 사이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자연스럽게 뒷전이 됐다.
이번 대회에서는 여느 때처럼 수많은 꿈나무들이 나올 것이다. 이들은 한국 스포츠의 든든한 대들보로 거듭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육상, 수영, 축구, 야구, 테니스, 정구, 농구, 배구, 탁구, 핸드볼, 씨름, 유도, 양궁, 체조, 배드민턴, 태권도, 롤러 등 초등학교 17개 종목과 육상, 수영, 축구, 야구, 테니스, 정구, 농구, 배구, 탁구, 핸드볼, 럭비, 사이클, 복싱, 레슬링, 역도, 씨름, 유도, 검도, 볼링, 양궁, 사격, 체조, 하키, 펜싱, 배드민턴, 태권도, 근대3종, 롤러, 카누, 조정, 소프트볼, 요트, 트라이애슬론 등 중학교부 33개 종목을 살펴보면 소년체전에 출전하는 아이들이 결국 우리나라 엘리트 스포츠를 이끌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한국 스포츠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 전국소년체육대회는 우여곡절 끝에 1972년 출범했다. 1960년대 들어 전국체육대회는 해를 거듭할수록 비대해져 갔다. 1971년 제 52회 대회부터는 거대 도시인 서울에서조차 대회를 치르기 벅차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대회가 커지면 지방 도시에서 열기 어려운 것은 둘째 치고 과연 대회의 비대화가 바람직한 것이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제기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대한체육회는 전국체육대회의 규모를 줄이기 위한 방안으로 전국 규모 주니어체육대회의 창설을 1970년도 사업 계획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미온적인 자세로 대회를 열기까지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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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대한체육회는 일본체육협회와 함께 마련한 한일고교환경기대회를 소화하고 있었다. 대회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일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던 스포츠소년단을 국내에 도입해 전국체육대회의 비대화를 막는 방안으로 활용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1972년 첫 대회의 정식 명칭이 ‘스포츠소년단 창단 기념 제1회 전국스포츠소년대회’라는 것을 보면 대회의 도입 과정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명칭은 1974년 제 3회 대회까지 사용되다 스포츠소년단 창단이 재정 문제 등으로 흐지부지되자 1975년 제 4회 대회부터 ‘전국소년체육대회’로 바뀌었다. 제 1회 대회에서는 스포츠소년단 단기가 게양되고 단복과 단모를 착용한 선수단이 줄지어 입장했다. 당시 대회 구호였던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나라도 튼튼’은 한동안 스포츠팬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친숙한 문구가 됐다.
전국소년체육대회가 낳은 대표적인 선수는 수영의 최윤희와 역도의 전병관이다. 1979년 제 8회 대회 초등부 수영 여자 배영 100m와 200m에서 2관왕을 차지한 최윤희는 3년 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1982년 아시아경기대회 배영 100m와 200m 그리고 개인혼영 200m에서 모두 1위를 기록했다. 국내 여자 선수로는 처음 등극한 아시아경기대회 3관왕이었다. 1983년 제 12회 대회 중학부 역도 48kg급에서 우승을 거머쥔 전병관도 이후 국제무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섰다. 1988년 서울 올림픽 52kg급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56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두 선수 외에도 양궁의 양창훈 등 수많은 우수 선수들이 전국소년체육대회를 통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등에서 메달리스트로 거듭나는 꿈을 키웠다.
신명철 스포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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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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