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삼성전자, 37년전 첫 거래 종가는 1050원

시계아이콘읽는 시간1분 49초

주가 따져 6500배 성장한 삼성전자株 돌아보니
1株 '공책값'이 '노트북값' 될 줄은 무릎팍도사도 몰랐다


[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정확히 37년 전인 1975년 6월11일. 서울 명동과 부산에 소재하고 있던 한국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에 한 기업의 주식이 첫 거래를 시작했다.

회사명은 삼성전자다. 138번째로 거래소 상장사 명단에 이름을 올린 이 회사는 앞서 5월29일 87만3450주(8억7345만원)를 공모증자해 기업을 공개했으며, 이날 액면가 1000원에 300만주(30억원)를 상장했다. 가격 폭 제한선인 50원이 올라 상종가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증시에 입성했다.

삼성전자, 37년전 첫 거래 종가는 1050원
AD


1970년대 상장사들의 액면가는 평균 500원이었던 점과 비교해볼 때 삼성전자의 액면가 1000원은 비싼 편에 속했다. 1975년 4·4분기(10~12월) 기준 당시 전 산업(농업·임업·수렵업 및 수산업 제외)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4만952원이었고, 짜장면 한 그릇의 가격, 라면 한 봉지 가격이 20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시에도 국민들이 삼성전자 주식을 살 형편은 되지 못했다.

삼성전자는 1969년에 설립돼 이제 갓 다섯 번째 생일을 지난 신생기업에 불과했다. 1958년 설립된 금성사(현 LG전자)를 주축으로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던 전자시장 진출을 위해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설립했다는 점만 부각됐을 뿐 당시만 해도 그저 재벌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로만 치부됐다.


2012년 6월11일 오전 10시18분 현재 삼성전자는 전날보다 2만4000원이 오른 127만1000원을 기록 중이다. 이 시간 기준 시가총액은 187조원대에 달하고 있다. 지난해 11월29일 주당 100만원 돌파, 올 4월27일 시가총액 200조원 돌파 등 신기록을 연이어 쓰고 있는, 한국 증시에 없어서는 안될 주인공이 됐다.


37년 전 첫 주식 거래일과 단순 비교만 해도 무려 6500배 넘게 성장한 것이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로 커진 현재의 모습을 창업주는 물론 당시 투자자들은 예측을 했을까?


현재 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는 ‘황제주’로 인정받는 삼성전자는 하지만 자발적으로 상장을 택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2년 ‘증권거래법’의 탄생, 1968년 ‘자본시장 육성에 관한 법률’ 제정,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 제정 등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주식시장 육성을 위한 법적 토대를 닦아나갔지만 기대만큼 일이 풀리지 않았다.


1960~1970년대만 하더라도 일반인들의 주식시장 참여율이 저조한 데다가 연이어 터진 주식파동으로 주가가 폭락하면서 주식시장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유자가 곧 경영자’라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작용했던 당시 기업 경영문화도 주식 상장을 꺼리는 요인이 됐다. 특히 일부 재벌과 대기업들은 정부 특혜를 등에 업고 외형만 키우려고 폐쇄적인 경영체제를 고수했으며, 사업 자금은 주로 은행 돈이나 외자를 빌어쓰는 방식을 고수했다.


결국 박 대통령은 1974년 5월29일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 풍토 조성을 위한 대통령 특별지시’라는 이름의 ‘5·29 조치’를 단행했다. 빚더미 위에서 안일한 경영을 일삼아온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을 일깨운 조치였다. 이를 통해 비공개 대기업에 대한 여신관리를 강화하고 비공개 기업과 그 대주주에 대해서는 여신 및 납세 상황을 종합 관리할 것 등을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정부는 우선 50억원 이상 여신을 받고 있는 계열집단을 A, B군으로 분류해 재무구조가 양호한 B군에 속한 기업들에는 공개 적격성 및 증시 상황 등을 감안해 기업공개촉진법에 의한 공개 지정권을 발동키로 했다. 강제조치와 더불어 대기업 소유주들에 대한 회유책도 병행했다.


결국 삼성그룹은 1974년 7월19일 오후 계열사 가운데 삼성전자와 제일모직을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김성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이끌던 쌍용그룹에 이어 대기업 가운데에서는 두 번째 결정이었다.


삼성전자를 비롯해 1975년 상반기에 기업 공개를 한 기업은 약 25개사 정도였는데 그러다 보니 당시 상장사 중에는 첫 거래일이 6월에 이뤄진 기업들이 많았다. 이는 12월 말 결산법인이 결산 직후 6개월 이내에 공개하면 정부가 세제상 공개법인 혜택을 제공한 데 따른 것이었다.


비록 방법에 있어서는 무리가 따랐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당시의 상장은 옳은 결정이었다. TV를 중심으로 가전사업 위주였던 삼성전자는 1983년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 직후 메모리 반도체, 그중에서도 D램 사업에 진출한다. D램 사업은 사업장을 하나 건설할 때 드는 비용이 조원 단위가 소요되는 대규모 투자사업이다. 이러한 투자자금을 마련하는 데 있어 증시 상장이 적잖은 기여를 했으며, 결국 삼성전자는 D램 사업에서 일본을 따라잡고 1992년부터 현재까지 21년째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더불어 주가도 뛰어올라 한국전력과 포스코 등 정부 투자기업에 이어 3위권을 유지하다가 1999년 한국통신을 잡고 1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대 2000년대에 들어서는 독보적인 황제주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채명석 기자 oricms@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