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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박해일의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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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박해일의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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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운명을 상징한다면, 박해일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 조용한 바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이 잔잔한 수면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해일은 일단 모습을 드러내면 해변을 집어삼키며 큰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선량한 얼굴 뒤에 팽팽한 긴장과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감춘 박해일의 연기는 종종 해일처럼 관객들을 덮쳤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물론, <질투는 나의 힘>과 <연애의 목적>에서 그의 얼굴은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고 보는 이의 판단을 유보시켰으며 <국화꽃 향기>와 <최종병기 활>에서는 장르적으로 인물을 몰아붙이는 그의 돌파력이 돋보였다. <극락도 살인사건>과 <이끼>에서 그를 관찰자로 캐스팅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박해일의 평범한 얼굴과 말간 표정만큼 예민하게 상황을 반영하는 바로미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흔의 노인을 연기해야 하는 <은교>는 박해일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어려운 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겪어 보지 못한 나이, 감정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는 막연히 노인의 몸에 적응하기보다는 문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사회성이 떨어질 것이며, 평생 시를 써왔으니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 확고할 것이라는 추측을 통해 조금씩 이적요를 세공해 나갔다. 바위 위를 걷는 장면을 위해서는 몸에 밴 등산의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 실내 암벽등반을 배웠으며, 분장이라는 장막을 뚫고 전달되는 세밀한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고민과 토론을 거듭했다. 그동안 해가 바뀌고, 계절이 변했다. 그리고 박해일은 노인의 몸을 벗고 다시 소년의 얼굴이 되었다. “아직은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라고 말하며 푸른 웃음을 지어 보이는 박해일이 고른 다음의 노래들은 그래서 바로 지금, 박해일의 OST다. 겨울이 가고, 봄이 찾아오는 동안 그가 들을 수밖에 없었던 노래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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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박해일의 OST

1. 이정선의 <이정선 1집>
“이적요의 분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완성하고 나면 10분 정도, 거울을 보면서 생각하곤 했어요. ‘나는 이적요다. 나는 이제 노인이 된다.’ 그리고 현장으로 걸어가면서 점차 70살이 되어서 노인의 마음으로 스태프들을 맞이하는 거죠.” 새로운 인물이 될 뿐 아니라 경험하지 못한 나이를 살아야 하는 탓에 박해일은 이적요가 되기 위해 자신에게 최면을 걸어야 했다. 그리고 이정선의 ‘행복하여라’는 그런 박해일의 몰입에 큰 도움이 된 고마운 노래다. “정지우 감독님께도 이 노래를 들려 드린 적이 있는데, 새벽 내내 노래를 들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느낀 어떤 감정을 마찬가지로 발견하신 것 같아요.” 해바라기의 초창기 멤버이자 기타 교본의 저자로 유명한 포크 뮤지션 이정선의 첫 앨범에 실린 ‘행복하여라’는 ‘사랑하는 까닭에’라고 반복되는 후렴구가 인상적인 노래.


박해일│박해일의 OST

2. 백현진의 <1집 Time Of Reflection>
조용한 노래가 모두 고요한 것은 아니다. 조용하지만 깊은 격정이 묻어나는 백현진의 노래들은 그런 점에서 말간 얼굴 뒤에 벅찬 에너지를 감춘 박해일의 연기와 닮아 있다. “연극을 하던 젊은 시절에 어어부프로젝트의 노래들이 참 유명 했어요. 그때부터 백현진 씨에게는 늘 관심을 갖고 있었죠”라고 박해일이 소개한 두 번째 노래는 백현진이 혼자 만들고 부른 노래 ‘무릎베게’다. 일기에 버금갈 만큼 구체적이지만 한편으로 암호와 같은 백현진의 문장들은 시어가 되어 듣는 이의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 마치 모두를 떠나보내고 자신만의 방에 틀어박힌 이적요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덧붙여 <은교>에서는 배우로 변신한 백현진의 모습을 잠깐 만날 수 있다.

박해일│박해일의 OST

3. 손지연의 <3집 메아리 우체부 삼아 내게 편지 한통을>
백현진이 박해일에게 선물한 것은 노래의 감상만은 아니었다. “장충동에 있는 공연장이었던 것 같아요. 백현진 씨의 콘서트를 보러 갔는데, 손지연이라는 가수가 그날같이 공연을 하더라구요. 그때 처음 봤는데 정말 인상에 깊이 남아서 이후로 종종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포크 음악에 블루지한 감성을 더하는 싱어송라이터 손지연은 묵직한 선율과 가사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공연 위주로 활동을 벌이다 MBC <음악여행 라라라> 출연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3집 앨범의 커버는 마광수 교수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박해일이 추천하는 노래 ‘여독’에는 오랫동안 이적요의 삶을 살다 드디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그의 피로감이 투영된다.


박해일│박해일의 OST

4. Bob Dylan의 < The Essential Bob Dylan 3.0 >
기타와 목소리. 부르는 사람이 쓰는 가사. 박해일이 선택한 노래들의 공통점은 밥 딜런에 이르러 일종의 확신을 준다. 그러나 정작 그는 “반드시 노래의 가사에 집중하는 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기분을 전환할 때, 잠깐 주어지는 휴식 시간에 주로 듣게 되는 노래들은 메시지와 단어를 넘어 음악 자체의 힘으로 그를 설득하고 위로한다. “외국어로 된 노래들은 심지어 가사를 일부러 찾아보는 편도 아니에요. 하지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것이 있어요. 그런 게 음악의 힘 아닌가요.” 그래서 박해일은 밥 딜런의 명곡 ‘Blowin' in the wind’를 선곡한 이유에 대해서도 “저에게는 이 노래가 봄의 느낌이거든요. 흥얼흥얼, 이 계절에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라고 담백한 이유를 더한다.


박해일│박해일의 OST

5. Joy Division의 < Permanent >
“이 노래에 이르면 진짜 박해일의 봄인 거죠.” 촬영을 끝내고, 드디어 영화 개봉을 앞둔 박해일은 이제야 영화 속 인물에서 제법 빠져나오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오래전 들었던 조이 디비전의 앨범을 다시 들으며 완전한 봄, 완연한 젊음을 상기하고 있다. “물론 <은교>는 노년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젊음이 참 좋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거든요. 따지자면 51%는 후자예요. 영화를 보고 나와서 봄이라서 참 좋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 하셨으면 좋겠어요.” 단 두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언 커티스가 이끌었던 밴드 조이 디비전의 ‘Love will tear us apart’는 이후 밴드의 남은 멤버들이 결성한 뉴 오더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한 시대의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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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일│박해일의 OST

아이러니하게도, <은교>의 정지우 감독은 “박해일의 소년적인 모습” 때문에 그를 노인 역에 캐스팅 했다고 밝혔다. 어떤 나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마음속에 소년의 순수와 설렘을 간직한 인물을 그리고 싶다는 것이 감독과 박해일의 공통된 작심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박해일이 연기하는 이적요의 젊은 시절은 작품을 통틀어 가장 눈부시고 아름다운 장면이다. 그래서 <은교>는 박해일의 일탈이나 도전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가 보던 박해일의 모습, 소년의 길이다. “늘 답에 가까워지는 것 같지만 결국 작품이 끝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영화를 놓을 수 없다”고 말하는 모범생은 “나이가 들면 새로운 캐릭터가 주어지니까 아마 평생 정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고개를 갸웃한다. 답 없는 길을 호기심으로 걸어 나가는 소년의 영혼이 늙지 않는 한, 박해일의 다음 걸음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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