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이공계 기피 현상은 그동안 수차례 지적돼 왔다. 어렵고 복잡하면서도 별로 돈벌이(?)는 되지 않는 배경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기반이 흔들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 것은 당연하다.
위기의 현실화인가. 기업에서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신사업이 인력 부족으로 첫걸음 떼기조차 쉽지 않는 상황이 연출됐다. 그것도 국내 재계 2위 그룹에서 말이다. 현대자동차그룹 얘기다.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차량용반도체 및 시스템 설계 연구개발(R&D)을 전문적으로 하는 '현대차전자(가칭)'를 설립했는데 여기에서 일한 마땅한 인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 사업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최근 열린 현대차 주주총회 인사말에서 "전자제어분야를 강화하겠다"고 표명할 정도로 그룹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 사업인데도 인재난에 직면한 것이다.
현대차가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면서까지 전장관련 기술개발에 목을 매는 이유는 기술의 독립이다. 외부에 의존했던 차량용 반도체 관련 기술을 자체 개발해 공급할 경우 원가를 낮춰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부품 비중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추세를 감안하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다. 현대ㆍ기아차가 전세계에서 질주할 수 있던 배경도 자체 기술을 통한 수직계열화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인재를 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야 인력을 확보하기가 만만치 않다. R&D에서는 사람이 재산인데 턱없이 부족하다. 인력 부족은 결국 사업 성과의 부실로 연결될 수밖에 없다. 국내에 쓸만한 인력을 전부 모아도 현대차그룹의 구미를 맞추기가 어렵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현재 100여 명 수준인 현대카네스 인력을 3배 이상 키우고 싶은 게 현대차그룹의 속내다. 현대ㆍ기아차 남양연구소의 관계 인재를 연계하겠다고 밝힌 것도 인재 부족에 따른 고육지책인 셈이다.
얼마전 만난 그룹 임원도 비슷한 걱정거리를 토로했다. 그는 "전자제어 분야를 제대로 아는 인재가 국내에는 드물다. 다른 기업에서 스카우트를 하려고 해도 자동차와 관련한 인재를 고르는 건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이공계 기피 결과의 한 단면인 셈이다.
지난해 국내 유수 자동차부품회사에는 L전자 연구원들이 몰렸다. L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인데다 차부품회사에서 전자제어 관련 인재를 원했기 때문이다. 양쪽의 입장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그렇다면 결과는? 실망스럽게도 상당수가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다. 가전과 자동차의 근본적인 차이를 간과했다는 게 이유다. 자동차는 움직이면서 다양한 환경을 접하는 반면 가전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자동차는 생명과 직결돼 더욱 정밀한 작업을 요구한다. 자동차 전자분야를 이해하는 인재는 여전히 부족하다.
이 업체의 걱정은 오히려 늘었다. 현대차가 반도체 및 시스템 설계 분야를 강화하면서 인력을 빼갈까 하는 점 때문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이 해결되지 않는 한 결코 풀리지 않을 숙제가 자동차업계에 주어졌다.
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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