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채정선 기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표지는 어째서 '중산모자를 쓴 남자'인 걸까?
민음사가 밀란 쿤데라 전집을 냈다. 먼저 ‘농담’ ‘삶은 다른 곳에’ ‘웃음과 망각의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다섯 권이 선보였다. 이번 밀란 쿤데라 전집은 세계 최초의 전집 출간이며,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전집은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하고 있다. 민음사의 경우 지난 요시모토 바나나 전집, 밀란 쿤데라 전집을 포함해 앞으로 출간할 헤밍웨이 전집 등에 명화를 사용하고 있다. 미술에 관한 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표지에 명화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일수록 명화를 표지로 사용하는 이유
13년째, 현재 280여 권에 이르고 있는 세계문학전집이 표지에 명화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경우다. “세계문학전집은 13년째 출간하고 있다. 당시는 장기간 출간한다는 것을 고려했다. 1~2년 지나면 금세 질리기 때문에 시의성 있는 이미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감동을 줄 수 있는 이미지면서 동시에 문학과도 잘 어우러지는 것이 필요했다. 텍스트를 표지 이미지로 디자인하면서 동시에 시대상을 같이 할 수 있는 것. 고민 끝에 명화를 선택했다.” 박경리 민음사 편집자의 말이다.
오랫동안 꾸준히 선보이는 세계문학전집의 경우, 오래 두고 봐도 질리지 않는 표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명화는 질리지 않으면서 작품에 무게감을 준다. 그래서 민음사는 세계문학전집에서 그리스 신화에 관한 책이라면 그리스 시대 유물에 등장하는 그림을 사용한다. 또 작품이 18세기에 나온 것이라면 같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을 선택하는 등 나름의 방침을 따르고 있다. 예를 들어, 톨스토이 ‘안나 카레리나’는 동시대 러시아 화가 크람스코이의 그림‘미지의 여인’을 썼다. 그람스코이는 톨스토이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고 그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이기도 하다. 게다가 ‘미지의 여인’은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암묵적으로 안나 카레리나를 그린 것이라고 용인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피카소의 그림은 책 표지로는 만나기 힘들다
명화라고 해서 어느 작품에나,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만은 없다. 저작권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 전집에 사용한 르네 마그리트 그림은 저작권 문제로 사용이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밀란 쿤데라 전집을 담당한 박경리 편집자는 말한다. “그림을 사용할 때 디자인상 조금 잘려 나가거나 인쇄했을 때 원본 색감을 낼 수 없다거나 하는 문제를 제기해온다. 작품에 2차 훼손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최대한 망가뜨리지 않게 사용하는 선에서 허락을 받았다. 표지 안쪽에는 원본 크기의 그림 작게 넣었는데, 이것 또한 작품을 사용하기 위한 합의 사항이었다. 꼭 마그리트 그림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노력을 기울였다. 저작권을 관리하는 마그리트 재단 측에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다행히 르네 마그리트 표지는 밀란 쿤데라도 무척 흡족해했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마르크 샤갈의 경우, 인지도가 높고 그림이 화려해서 편집자들이 표지로 탐내는 경우. 그러나 저작권 관련, 까다로워 쉽게 허락이 나질 않는다. 그간 딱 한번을 사용했던 적이 있는데, 세계문학전집에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다. 비율이 맞아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는 경우라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피카소는 애초에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좀처럼 허락이 나지 않고,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곧 출간을 앞둔 헤밍웨이 전집에는 앙리 마티스의 그림이 표지에 사용되는데, 한 번의 저작권료를 지불하면 얼마든 사용 가능해서 쉬운 축에 속한다.
표지, 때론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다
좋은 그림(표지)은 작품 판매고에 영향을 미친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경우 전집에 일본 현대미술작가 요시모토 나라의 그림을 사용했다. 그들 간에 친분도 있었고, 작품 색깔이나 타깃에 무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 요시모토 바나나의 팬이, 요시모토 나라의 팬이 모두 그 전집을 갖고 싶어 한다. 판매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손미선 민음사 편집부 차장의 말이다.
책 표지에 공을 들이는 이유, 앞서 말한 대로 판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행본은 작품의 특성을 살리는 선에서 눈에 띄는 감각적 디자인을 차용하는 반면, 전집은 오래 두고 봐야 하는 만큼 질리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한다. “2~3년으로 차이를 말할 순 없지만 10년 전부터 생각한다면 변화가 확연하다.
10여 년 전 보르헤스 전집에서의 디자인은 확실히 지금과 다르다. 좀 더 감각적이란 생각이 든다. 5년 전쯤에는 일러스트를 많이 썼던 것 같다. 북폴리오에서 출간한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를 예로 들 수 있겠다. 요즘엔 사진을 많이 쓰는 것 같다. 2008년 모던 클래식도 그림 아닌 사진을 사용하는 것으로 포맷을 정했다.” 손미선 차장의 말이다.
책 표지와 디자인도 트렌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저자, 옮긴이에 대한 나름의 기준으로 책을 구입하려는 게 아니라면 표지와 제목이야말로 영향력 있는 선택 기준이기 때문이다. 출간한 지 오래된 전집 디자인을 ‘디자인 특별판’이란 이름으로 내놓는 것도 같은 이유다. 민음사는 지난 2009년에 세계문학전집을 이상봉, 안상수, 김한민 등 각계 다양한 디자인 관련 인물과 함께 특별판으로 내놓은 적이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알몸으로 중산모자를 쓰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비나에서 착안한 것이 마그리트의 ‘중산모자를 쓴 남자’다. 이 장면은 편집자가 맨 처음 밀란 쿤데라와 마그리트를 연관시킨 대목이었다고도 전한다.
책과 표지는 이렇게 무관하지 않은 텍스트,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그러니 ‘어째서 표지에 이 그림이 사용됐을까’에 관한 궁금증을 갖고 들여다보면서 이유를 찾아보는 것도 독서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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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정선 기자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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