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경영자(CEO) 선임에 (성별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지난 10월 미국 IBM의 CEO 사무엘 팔미사노가 여성인 버지니아 로메티 선임부사장을 후임에 임명하면서 한 말이다. 100년 역사의 IBM에서 여성 CEO가 탄생한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IBM은 가장 남성적인 기업으로 꼽힌다. 양복, 넥타이에서 양말까지 푸른색으로 통일한 군대식 드레스코드가 전통이었다. 지금도 회사 주요 행사 때는 사가(社歌)를 부른다. 그런 기업이 여성 CEO를 선택한 것이다.
로메티가 CEO로 선임되기 한 달 전에는 컴퓨팅업계에서 IBM과 쌍두마차를 이루는 휼렛패커드(HP)의 CEO로 이베이 CEO 출신의 여성 기업인 멕 휘트먼이 취임했다. 미국의 100대 기업에는 이들 외에도 ADM의 페트리샤 위츠, 펩시콜라의 안드라 누이, 듀폰의 멜렌 클먼 등 여성 CEO가 즐비하다. 미국이 유별난 게 아니다. 유럽연합(EU) 의회는 기업 여성임원 할당제를 도입했다. 노르웨이의 경우 상장기업의 여성 이사가 40%를 넘어선다.
한국에서 여성 CEO, 여성 임원의 현실은 어떤가. 어제오늘 신문은 삼성그룹의 임원인사를 전하면서 '여성 중용'을 큼지막하게 보도했다. 부사장에 오른 삼성전자의 심수옥 전무는 화제의 중심이 됐다. 삼성의 여성 임원 승진은 모두 9명으로 사상 최대 규모라고 한다. 하지만 승진 임원이 총 501명이니 여성 비율은 100명에 2명꼴이 채 안 된다.
이건희 회장이 얼마 전 "여성도 CEO를 할 때가 됐다"고 말한 데서 엿보이듯 삼성은 그래도 여성 인재 중용에 가장 앞서간다는 평을 듣는다. 연말 대기업의 인사가 이어지지만 여성 CEO는커녕 삼성만큼이라도 여성에 시선을 돌린 곳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 총리, 대법관, 국회의원에서 사관생도까지 나오는데 왜 기업의 CEO는 없는가. 전무한 것은 아니다. 재벌그룹 총수, 간판 계열사의 CEO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오너 일가라는 선택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
청렴ㆍ섬세ㆍ경청이 특장인 여성 인재는 지식경영과 스마트 시대에 잘 맞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여성 소비자 파워도 갈수록 강해진다. 여성의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도태될 것이란 경고에 한국 기업들은 귀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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