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했으되 그리 개운치는 않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의 아랍에미리트 전과 더불어, 지구촌 곳곳에서는 중요한 A매치들이 펼쳐지며 울고 웃는 이들을 양산했다. 아시아에서만 해도 프랑크 레이카르트(사우디 아라비아), 폴 르구엔(오만),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중국)와 같은 유럽 지도자들이 벌써부터 월드컵 예선의 녹록치 않음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다. 이란의 수장 카를로스 케이로스 정도만이 어깨를 으쓱할 듯싶다.
아프리카에서 막을 내린 2012 네이션스컵 예선에서는 전통의 강호들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카메룬과 나이지리아, 이집트와 알제리, 그리고 월드컵 개최국 남아공이 그 주인공들이다. 카메룬, 나이지리아 국적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는 유럽의 클럽들에겐 물론 좋은 소식이겠지만 말이다. 모두가 두 번씩 돌려붙는 남미의 월드컵 예선은 극심한 혼조세로 출발했다. 두 경기를 치른 팀들 가운데 2승 팀이 단 한 팀도 없다. 칠레를 상대로 좋은 경기를 치렀던 아르헨티나는 두 번째 경기에서 극단적 실리 축구의 베네수엘라에 덜미를 잡혔다. 지난 코파 아메리카에서 발휘됐던 베네수엘라의 세트플레이 위력이 여전히 말을 했다.
유럽에서는 유로2012에 참여할 16개 팀 가운데 12팀이 확정됐고 이제 네 쌍의 플레이오프 대결만을 남겨놓은 상황이다. 예선이 진행되는 내내 유로2008의 우승자, 준우승자가 가장 두드러졌다. 스페인이 8전 전승에 26득점 6실점, 독일은 10전 전승에 34득점 7실점이라는 가공할 위력을 뽐냈다. 독일의 수장 요아힘 뢰브가 "유로2012의 우승후보는 스페인과 독일 두 팀으로만 국한되지 않는다"며 신중한 태도를 피력한 바 있지만, 멤버 구성의 밸런스와 선수층, 경기력과 조직력의 모든 차원을 고려할 때 스페인과 독일은 적어도 현재로선 세계 축구를 리드하는 두 국가대표 팀임에 틀림이 없다. 특히 세계 축구계는 유로96 이후 이렇다 할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한 독일을 주시하고 있다.
실상 국가대표와 클럽을 막론하고 근자의 독일 축구가 올해만큼 주목을 받고 있는 시기도 없다는 생각이다. 국가대표 무대에서 독일이 스페인을 넘을 수 있는 유력한 대항마로 떠오른 것과 때를 같이 하여, 분데스리가의 바이에른 뮌헨(이하 바이에른) 또한 올 시즌 모든 공식 경기에서 11승1무1패 31득점 1실점이라는 경이적인 성적을 올리며 바르셀로나의 잠재적 대항마로 손꼽히고 있다. 전술과 조직력, 경기력의 모든 측면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제압했던 챔피언스리그 한 판은 바이에른의 가공할 페이스가 '단지 분데스리가이기에 가능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징표다. 그만큼 바이에른은 지난 시즌과는 많이 달라졌다.
새 감독 유프 하인케스의 부임 이후 바이에른은 조직적인 압박과 공수 밸런스 면에서 눈에 띄는 향상을 보았다. 전체 선수들의 성실한 압박 참여야말로 루이 반 할 시절과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올 시즌의 유일한 실점 장면을 제외하고는 마누엘 노이어, 제롬 보아텡과 같은 새로운 영입들도 수비력 증진에 효과 만점이었다. 또한 하인케스의 적절한 용병술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필립 람과 같은 고참급의 농익은 플레이는 물론,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홀거 바드슈투버와 같은 젊은 선수들의 능력과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마리오 고메스는 12경기에서 12골을 기록 중이며, 프랑크 리베리가 자신의 옛 모습을 서서히 되찾아가며 팀플레이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르옌 로벤의 공백을 표 나지 않게끔 했다. 한동안 바이에른을 먹여 살리다시피 했던 로벤까지 돌아오게 되면 바이에른의 파괴력 및 선수층은 더 좋아질 것이다.
로벤과 리베리의 경우는 물론 독일 선수가 아니지만, 바이에른의 쾌조의 컨디션은 앞으로의 독일 대표 팀이 지금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주는 요인들 가운데 하나다. 물론 시즌은 길고 변수는 많으며, 잘 나아가는 클럽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것이 여름의 국가대항전에서 불리하게 나타나는 경우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클럽에서의 경기력이 대표 팀 경기력의 바탕이 되는데다, 축구사의 관점에서도 하나의 강력한 클럽에서 기량과 조직력을 높여온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 팀이 위력을 발휘했던 사례가 종종 눈에 띄는 까닭이다. 게다가 독일의 수장 뢰브는 바이에른이 제공하는 양분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영리한 사나이다.
가장 비근한 사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의 관계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다수를 이루면서 바르셀로나의 스타일을 장착한 스페인 대표 팀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국가대항전 징크스를 완벽하게 털어냈다. 1950년대의 전설적인 헝가리 또한 구스타프 세베스 감독 이하 페렌치 푸스카스를 비롯한 혼베드 멤버들이 절대 다수를 이뤘던 팀. 1982년 월드컵을 거머쥔 이탈리아의 뼈대는 디노 조프, 클라우디오 젠틸레, 가에타노 시레아, 안토니오 카브리니, 마르코 타르델리, 파올로 로시가 소속된 유벤투스였다. 월드컵이나 유로에서 우승에까지 이르렀던 것은 아니나, 명장 발레리 로바노프스키가 자신의 클럽 디나모 키에프 멤버들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소비에트 연방(구 소련) 대표 팀 또한 80년대 중후반 세계 축구계에 위명을 떨친 바 있다.
물론 독일 축구 안에도 그러한 역사가 있었다. 축구사에 길이 남을 197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토털풋볼' 네덜란드를 물리치고 월드컵을 들어 올린 서독 대표 팀이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당시의 서독을 구성한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파울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한스 게오르그 슈바르첸벡, 그리고 골키퍼 제프 마이어가 모두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들. 최고의 모습을 펼쳐 보이고 있는 바이에른의 독일 선수들이 유로2012에서 선배들의 이러한 업적을 재연할 수 있을지가 벌써부터 궁금하다.
한준희 KBS 축구해설위원·아주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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