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현보다는 살짝 늘어진 현이 좋은 울림을 낸다. 영화 <의뢰인>에서 강성희 변호사 역을 맡은 하정우의 연기를 보며 오래된 잠언이 떠올랐다. 과거 작품에서 그의 연기가 어색했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이번 작품에서 그는 살짝 이완된 톤과 리듬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관객이 강성희란 인물을 따라오도록 만든다. “한 신에서 캐릭터의 밀도를 높이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동선을 생각했어요. 어떻게 하면 후반부에 관객들이 법정에서 이 사건을 맞이하게 할까. 여기서 제가 너무 진지하고 자기 안으로만 가져가면 관객들이 이입하고 따라올 수 있을까. 그래서 쉽게 풀어가는 가이드 역할을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추격자>에서 여형사에게 실실 웃으며 “생리하죠?”라고 묻던 살인마의 날 선 냉기나, 스크린을 연민으로 꽉 채운 <황해> 속 구남의 지치고 여린 눈빛처럼 배우가 만들어내는 강렬한 한 순간이 <의뢰인>에는 없다. 배우가 지워지고 영화가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아내 살해 혐의를 받는 한철민(장혁)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서 강성희라는 인물을 쫓아가다 어느 순간 여기저기 찍힌 그의 발자국들이 최종적으로 영화 자체의 큰 그림으로 남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도로가 막혀서 두, 세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음악을 듣는 시간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말할 줄 아는 삼십대 중반 남자의 여유 있는 시선이 연 또 다른 연기의 가능성. 그런 그가 삶의 여유를 지켜주는, 자신의 일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곡들을 골라주었다. 어쩌면 배우 하정우로서의 세계 역시 풍요롭게 해줄 그의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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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tevie Wonder의 < Song Review >
하정우는 각 추천곡들이 자신의 일상, 어디 어디에 배치되는지 말해주었는데 스티비 원더의 ‘For Once In My Life’는 “저녁 먹기 전에” 듣는 음악이다. 수사적 차원이 아니라,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명곡을 남긴 스티비 원더의 디스코그래피 중 ‘For Once In My Life’만의 대단함을 따로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만 ‘내 인생 처음으로 날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는 첫 가사가 그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일까. 여러 버전의 비디오 클립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이 노래를 부를 때 스티비 원더는 유독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신나는 리듬이란 기교의 차원이 아닌, 가수 스스로 즐길 때 가능한 법인데 ‘For Once In My Life’의 통통 튀는 리듬감은 그래서 더욱 돋보인다.
2. Morten Harket의 < Wild Seed >
하정우가 추천한 두 번째 곡은 “사랑하는 사람이 그리울 때” 듣는 모튼 하켓의 ‘Can't Take My Eyes Off You’다. 프랭키 발리(Frankie Valli)의 1967년 오리지널 버전을 ‘아하(A-Ha)’ 출신의 보컬리스트 모튼 하켓이 리메이크 한 것으로 영화 <컨스피러시>에 삽입되며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선 MBC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 테마곡으로 쓰이며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모튼 하켓 외에도 뮤즈와 일본의 사카이 이즈미 등이 리메이크를 했지만 역시 가장 대중적인 넘버는 모튼 하켓 버전이다.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사랑에 푹 빠진 화자의 감정을 잘 드러낸 이 곡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I Love You Baby’라 외치는 순간이다.
3. The Ting Tings의 < Shut Up And Let Me Go >
하정우는 팅팅스의 ‘Shut Up And Let Me Go’를 “우울할 때 듣는 음악”이라며 추천해주었다. 탁월한 처방이다. 팅팅스는 다분히 록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이들의 음악은 무엇보다 춤을 추기에 안성맞춤이다. 우울을 극복하기에 딱 좋은 치료제인 셈. 특히 그루브가 살아 있는 기타 리프에 케이티 화이트의 도발적인 목소리가 매력적인 ‘Shut Up And Let Me Go’는 예리밴드가 Mnet <슈퍼스타K 3> 예선에서 소화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난 8월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서 팅팅스가 직접 보여준 퍼포먼스 역시 굉장한 호응을 얻었는데 남녀 혼성 듀오라는 미니멀한 편성으로서 절대 부족하지 않은 사운드를 들려줘 한국 아티스트들에게도 신선한 자극이었다는 평가.
4. George Michael의 < Ladies and Gentleman >
네 번째 추천 곡인 조지 마이클의 ‘Freedom 90’은 “중요한 약속에 가기 전” 듣는 음악이다. 조지 마이클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건반과 기타 연주에 실려 조금씩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여성 보컬들의 풍성한 목소리와 함께 ‘Freedom’을 외치며 곡의 방점을 찍는다. 이 곡 발표 이후 벌어진 조지 마이클과 소니 뮤직 간 법정 공방 때문에 창작의 자유에 대한 내용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좀 더 보편적인 내용의 가사라고 보는 게 맞을 듯 하다. 나오미 캠밸, 신디 크로포드, 린다 에반젤리스타 등 당대 최고의 모델들이 출연하고 데이빗 핀처(David Fincher) 감독이 연출을 맡은 초호화 뮤직 비디오 클립으로도 유명한데, 여성 출연자들이 노래에 맞춰 립싱크를 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특히 후반부 일렉트릭 기타 연주의 리듬에 맞춰 화면을 넘기는 연출은 지금 봐도 감각적이다.
5. Steve Aoki의 < I'm In The House (EP) >
팅팅스의 신나는 곡 ‘Shut Up And Let Me Go’를 우울할 때 듣는 음악으로 처방해준 하정우는 역시나 신나는 곡인 스티브 아오키의 ‘I'm In The House’를 “신나는데 더 신나고 싶을 때” 듣는 음악으로 정의했다. 영화배우 데본 아오키(Devon Aoki)의 오빠이기도 한 DJ 스티브 아오키의 가장 대표적인 넘버다. 주퍼 블랍(Zuper Blahq)의 피쳐링과 스티브 아오키의 디제잉이 결합해 신나는 비트감을 만들어내는데 이어폰을 귀에 꽂는 것만으로도 지금 이 장소를 클럽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런 넘버다. DJ의 넘버답게 동명의 EP 안에서 여러 버전의 ‘I'm In The House’를 들을 수 있는데 일렉트로니카의 느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역시 오리지널 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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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로맨틱 코미디 <러브 픽션>, 공효진 씨랑 찍고 있어요. <황해> 촬영 일정이 예정보다 4, 5개월 늘어나면서 계속 촬영이 다닥다닥 붙어버렸네요. 12월에 <의뢰인> 크랭크인해서 4월에 끝났고요, 4월에 <범죄와의 전쟁> 시작해서 7월 말에 끝났고요, <러브 픽션>은 8월 초에 시작해서 지금 찍고 있고. 허허,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이죠.”
자타가 공인하는 다작 배우라 해도 심하다 싶을 스케줄이지만 하정우는 일만 쫓는 워커홀릭의 집요함이나 일에 지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들로 진솔하게 연기해나가면 될 거 같아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주름살 하나가 그 사람의 궤적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잖아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배우로서의 삶을 산다면 그런 게 캐릭터를 통해 드러날 거 같아요”라 말할 줄 아는 배우라니, 이건 좀 멋지지 않나. 나이를 멋지게 먹을 줄 아는 흔치 않은 배우의 명단이 우리에게 하나 더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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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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