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팽팽하게 당겨진 현보다는 살짝 늘어진 현이 좋은 울림을 낸다. 영화 <의뢰인>에서 하정우의 연기를 보며 오래된 잠언이 떠올랐다. 부인 살해 용의자인 한철민(장혁)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서 그는 의구심 속에서도 끝까지 자신의 의뢰인 한철민을 변호하는 강성희 변호사를 연기했다. 여형사에게 실실 웃으며 “생리하죠?”라고 묻던 <추격자> 속 살인마의 날선 냉기나, 스크린을 연민으로 꽉 채운 <황해> 속 구남의 지치고 여린 눈빛처럼 어떤 강렬한 한 순간이 <의뢰인>에는 없다. 대신 살짝 이완된 톤과 리듬으로 그 어느 때보다 자연스럽게 관객을 안내하고, 어느 순간, 여기저기 찍힌 자신의 발자국들로 영화 자체의 큰 그림을 남긴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그와의 인터뷰가 삶의 여유에 대한 것으로 이어진 건 그 때문일 것이다.
<#10LOGO#> 이번 <의뢰인>에서는 검사 출신에 껄렁한 면이 있는 변호사 강성희로 나온다. 마치 MBC <히트>의 김재윤 검사가 변호사로 개업하면 그럴 것 같은.
하정우: 겹치는 부분이 있다. 김재윤과 비교하면 좀 더 노련해진 부분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변호사라는 게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소개되는 전형적인 직업군이지 않나. 그런데 영화에서 강성희라는 인물을 통해 관객이 법정까지 들어가게 된다. 어떻게 관객을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냐, 그에 대한 고민을 했는데 인물을 사람 냄새 나게 만드는 게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충분히 일상적인 톤으로 이야기하고 리액션 하는. 거기서 나오는 리듬감이 껄렁껄렁, 건들건들인 거다.
“전반전에는 디테일을, 후반전에는 집중력을 보여주려 했다”
<#10LOGO#> 실제로 그 리듬을 따라 이야기가 흘러가는데 한철민이 범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갈등 역시 직접적이기보다는 강성희를 통해 받아들이는 지점이 있다.
하정우: 시점이 강성희 변호사 중심으로 흘러가니까. 후반부로 갈수록 나 자신을 의심하고,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의심하고, 한철민을 의심하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일을 진행하려는 감정의 템포 변화를 신경 썼다. 이걸 가지고 너무 강성희가 진지해져버리고 자기 안에 들어가면 이 영화에 이입을 하고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 영화에서는 한 신 안에서 캐릭터의 밀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동선들을 생각한 것 같다.
<#10LOGO#> 그건 인물만 파기보다는 전체적인 맥락을 읽어야 하는 건데.
하정우: 중요한 건 이 영화를 맞이했을 때 관객이 원하는 게 무엇일지 파악하는 거다. 진지한 변호사를 원할까? 그건 다 예상했겠지. 영화 속에서 그런 상황을 맞이했을 때 하정우라는 배우가 무겁고 진지한 느낌으로 갈 거라고. 전작이 <황해>였으니. 그런 식으로 인물을 디자인해서 움직이면 빤하지 않나. 그러면 재미가 없으니 반대로 가볍게 가봤다. 많은 이들이 전작인 <멋진 하루>의 병운 역할을 얄미워하면서도 미워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는데 그런 인간적 매력과 진솔함을 부여하고 싶었다. 영화에서도 한철민이 베일에 싸인 인물이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거다. ‘변호사님 저 믿으세요?’라고 물으면 다들 내가 설득하는 장면을 예상할 텐데, 그 때 그냥 ‘웬만하면 다 믿어요.’ 이러면 분명 피식하는 부분이 있을 거다. 그런 디테일을 잡아가고 쌓아갔다. 영화가 전반전, 후반전으로 나눠진다면 전반에는 최대한 그런 디테일과 캐릭터적 재미를 표현하고, 본격적 법정신부터는 밀도 있게 집중력을 보여주려 했다.
<#10LOGO#> 말 그대로 법정 신에서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는데, 제작보고회에서 본인이 말했지만 연극 같은 느낌이 들더라.
하정우: 사실 영화 상 강성희가 검사인 안민호(박희순)보다 좀 불리한 입장 아닌가. 그래서 마지막 최후 변론은 마치 한철민의 친한 동료처럼 그가 왜 예민했는지 직업상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경찰이 어떻게 몰아갔는지 인간적 호소를 하고 그 동선을 짜야 했다. 기본적으로 연극은 저쪽 끝에 앉은 할머니에게 내 말이 잘 전달되는지, 저 마지막 열 앉은 사람 눈을 보고 연기하는 부분까지 어느 정도 계산하고 한다. 그런 시선을 방위적으로 360도 펼쳐서 충분히 골고루 주려고 했다.
<#10LOGO#> 그런데 영화는 연극과 달리 장면이 다 쪼개져서 촬영되지 않나.
하정우: 그러니까 다 같이 얘기해서 합을 짠다. 카메라가 트랙을 따라 움직이는 걸 나 역시 따라가며 연기하고 담아내야 하니까. 카메라가 움직이면 내가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동적인 느낌이 들고. 그걸 감독님, 촬영감독님이랑 상의를 많이 했다. 그래서 법정 세트 기간에는 촬영 끝나면 다음날 찍을 리허설을 했다. 그러고서 다음날 거기에 맞춰 쭉 찍고, 또 남아서 리허설 하고.
<#10LOGO#> 실제 법정의 동선을 연구한 부분이 있나.
하정우: 실제 법정은 딱딱하게 진행하더라. 동선도 없고. 세트 공간이 실제 법정보다 훨씬 넓다. 실제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얘기하거나 증인석 앞에 서는 정도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영화에 가져오면 지루하지 않나. 나 개인적으로는 <좋은 친구들>에서 로버트 드니로가 증인석에서 진술하다 갑자기 일어나서 카메라에 다가오는 동선이 있는데, 그에 영감을 많이 받았다. 나도 넓은 숏 안에서 천천히 걷다가 빨리 걷는 식으로 템포 변화를 주려 했다.
<#10LOGO#> 평소 리얼리티를 중요하게 여기는 걸로 아는데 단순히 실제를 재현하는 것과 달리 구현하는 리얼은 어떤 건가.
하정우: 일반 관객들이 보편적으로 예상하는 거? 상상하는 거? 그럴 법하다고 생각하는 게 영화적 현실이 아닌가 생각한다. 철저히 관객 입장에서 어렵지 않을까, 빠르지 않을까, 잘 소화시키며 한 신 한 신,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을지를 계속 생각하며 작업해야지.
“눈높이와 태도를 바꾸는 유연성으로 나이 먹으면 좋겠다”
<#10LOGO#> 그런 관객의 눈 때문에 캐릭터뿐 아니라 전체적 흐름까지 계산하는 건데, 그만큼 초기부터 감독과의 소통이 굉장히 중요하겠다.
하정우: 촬영 전에 방향성에 대해, 이 역할이 영화 속에서 수행할 미션에 대해 어떤 지점까지 해도 되느냐 이야기를 하지. 그 이전에 대본 리딩을 할 때도 (박)희순이 형이랑 (장)혁이 형이랑 같이 장면 하나하나를 파헤쳐가면서 심도 있는 대본 리딩을 하고. <황해>의 나홍진 감독님도 그런 스타일인데 그렇게 하고 들어가면 혼선도 없고 방향성이 뚜렷하니까 그 안에서 변주만 하면 된다. 그 안에서 감독이 선택을 하는 거고.
<#10LOGO#> 배우로서 연기를 잘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주연으로서 작품을 책임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정우: 늘 느끼는 책임감이다. 이 한 작품에 수백 명이 연관되어 있는데 최전방에 나서는 배우가 그런 의식과 책임감 없이 촬영하는 건 웃긴 얘기지.
<#10LOGO#> 그런데 요즘 그렇게 책임질 작품이 굉장히 많은 걸로 알고 있다.
하정우: <러브 픽션>이라고 로맨틱 코미디를 공효진 양과 하고 있고, <범죄와의 전쟁>은 끝났는데 구정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거 같다. <황해> 촬영이 예정보다 4, 5개월 연장이 되어서 예기치 않게 세 작품이 완전히 붙게 됐다. <의뢰인>이 12월에 크랭크인해서 4월 초에 끝났고, 4월 말에 <범죄와의 전쟁> 시작해서 7월 말에 끝나고, 8월 초에 <러브 픽션> 시작해서 아직 찍고 있다. 이거, 말도 안 되는 스케줄을... (웃음)
<#10LOGO#> 본인 책에서 연기하고 남은 잔여물이 있어서 그림으로 해결한다고 했는데 이런 일정을 들으면 무슨 잔여물이 있나 싶다. (웃음)
하정우: 그게 휴식이 되는 거 같다. 내가 예전에 일산에 살았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때 제일 좋았던 건, 집에 돌아갈 때 도로가 막히는 러시아워라 1, 2시간씩 걸릴 때 그 안에서 들은 음악과 그 안에서 했던 기도다. 그게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게 나의 많은 부분을 정리하고 계획하고 꿈을 키우고 다짐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촬영장에서 무섭고 놀라운 건, 컷 하고 쉬는 시간에 다 스마트폰을 꺼내고 있다. 나도 그러고. 그럼 내가 먼 산을 보며 멍 때리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 시간이 굉장히 그립더라. 그런 면에서 그림 그리는 건 어마어마한 휴식이다. 언젠가는 해야 할 시간. 그러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체하고 병에 걸리는 거 같다.
<#10LOGO#> 배우 외적인 삶이 배우로서의 삶에도 영향을 주는 건데.
하정우: 크게 말하지 않아도, 크게 표정 짓지 않아도 주름살 하나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지점이 있지 않나. 아무리 계산을 한다고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나. 어려운 거긴 한데, 발버둥 치고 계산해서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대신 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겠지. 충실하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진솔하게 살아간다면 그런 게 캐릭터를 통해 보이지 않을까 싶다.
<#10LOGO#> 어쩌면 어떻게 나이 드느냐의 문제다.
하정우: 새로운 현장을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일을 하며 전작의 느낌을 여기서 요구할 수는 없는 거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기에 내 눈높이를 맞추고 태도를 바꾸고 받아들이는 유연성을 가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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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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