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홍성모 ‘가을의 은유’ 연작
산수(山水)에서 얻은 정서와 운치의 묘사. 감정을 부드럽게 다스리고 순박하게 만드는 추일서정(秋日抒情)이 멋스럽다. 다양성 속의 여백미. 이것이 작가의 산수화 정신성이다.
마을 어귀로 들어가는 길은 동산을 에워서 돌아가는 흙길이었다. 장정 서넛 힘도 모자라는 풍어(豊漁)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면 맨발의 코흘리개 아이들은 뒤따르다 퍼덕거리는 물고기 한 마리를 못 잡아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잔돌 사이 숨어버린, 길을 잃고 올라온 새끼 게 한 마리를 찾느라 분주한 강아지 그림자가 바쁘게 오간 그 길 위엔 누르스름한 갈대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닻을 내리고 정박(渟泊)한 배는 무엇이 그리 졸리는지 커다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해댔다. 꾸덕꾸덕 마른 듯한 검붉은 갯벌에 석양(夕陽)이 비추면 괜스레 거기 서서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의 이름을 오래도록 불렀다.
그런 날이면 어김없이 가을은, 슬그머니 와서 붉은 립스틱보다 진한 그리움으로 물들이곤 했다. “삐우 삐우 갈매긴 바다를 울고…… 더구나 그 억척스러운 네 입맞춤을 어찌 하란 말이냐 바다여! 내 식어가는 가슴엔 노을이 타고…… 어디서 대바람에 실려 오는 아득한 종소리……”<신석정 詩, 바다의 서정>
후드득 후드득 제법 굵은 가을비 따라 한 줄기 해풍(海風)이 들녘으로 밀려왔다. 그러면 한 무리 은갈치떼가 퍼덕이며 휙휙 물살을 갈라 지나가듯 억새들이 윙윙 쓰러질 듯 소릴 내며 한꺼번에 고개를 숙이다 다시 솟아오르곤 했다. 가슴 저미는 것이 ‘너’만은 아니리. 물기 먹은 황토는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켜 홍조를 띤 채 빈 들에 외로움을 풀어놓았다.
소나무가 둥그렇게 감싼 아늑한 저곳을 찾아 온 노신사. 어릴 적 멱 감던 개울에 앉아 저어기 붉게 물들어가는 노령산맥을 물끄러미 쳐다보노라니 ‘와, 억새가 할아버지 머리색깔이랑 같아.’
무슨 대단한 발견을 한 듯 다섯 살배기 늦손자는 초롱한 눈망울로 생글생글 웃으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린다. ‘그래 은발(銀髮)이구나.’ 빙긋 웃는 입가엔 순간 쓸쓸함이 묻어난다. ‘어느새 해가 이렇게 짧아지다니.’ 그는 독백처럼 중얼거리며 일어섰다.
‘소나무는 겨울에도 늘 푸르단다. 이 넓은 들녘에 하얀 눈이 와도 저 소나무가 있어서 찾아오기 쉽지.’ ‘그럼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러 올 때도 좋겠다. 그지?’ ‘허허, 그 땐 이미 바람의 느낌으로도 알 수 있을 거야. 저 밭둑을 넘어서는, 뭉텅뭉텅 제 각각 덩어리로 산맥을 내려오는 그리고 저 솔향을 담아 네게로 반짝이며 부는 바람으로도.’
이코노믹 리뷰 권동철 기자 k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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