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1990년 현대중공업 기술개발담당 부사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 민계식 회장은 경영진 회의에 참석해 사업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1000마력급 중형엔진을 독자 개발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국내 선박용 엔진 제조업체들은 선박엔진 원천기술 보유업체인 독일 등 해외 업체에 로열티를 지급한 뒤 엔진을 만들어 왔는데, 민 회장은 엔진의 국산화를 이루지 않고서는 더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경영진들은 민 회장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수주한 선박만 잘 만들면 되지 엔진까지 개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민 회장은 경영진 회의에 참석할 때 마다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제안서 내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민 회장의 고집에 질린 경영진들은 결국 두손 들며 개발을 해보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10년의 연구개발 기간, 400억원을 투입한 끝에 2001년 4월 10일, 민 회장은 울산 조선소에서 결과물을 내놓게 됩니다. 자체 기술로 완성한 한국 최초의 '힘센(HIMSEN)' 엔진이었습니다. 힘센엔진은 중후장대를 특징으로 하는 중공업 부문에서 처음으로 만든 독자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High-Touch Medium Speed Engine'의 약어이기도 한 '힘센'은 엔진의 우수성을 잘 살린 브랜드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01년 첫 4대가 양산되며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간 힘센엔진은 현대중공업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줬습니다. 올 2월 누적 생산량이 5000대를 넘어섰으며, 연간 매출액도 매년 증가해 지난해 6700억원에 이어 올해는 7000억원 달성도 기대됩니다. 힘센엔진을 통해 현대중공업은 전 세계 중형엔진 시장 점유율 35%로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중형엔진=힘센엔진'이라는 등식이 생긴 것입니다.
지진해일 피해를 겪은 일본에 지원한 이동식 발전기(PPS)도 힘센엔진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인데, 전력 부족난을 겪는 국가들로부터 주문이 밀려들고 있으며, 고부가가치 선박인 드릴십에도 탑재되는 등 힘센엔진의 수요는 더욱 확대되고 있습니다.
만약, 20여년전 민 회장의 요구를 경영진이 끝내 묵살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힘센엔진의 자리는 다른 기업이 차지하고, 조선업 세계 1위 한국은 엔진에 있어서는 지금도 선진국에 종속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힘센엔진의 성공 사례는 한국 조선산업이 미래에도 성장을 이뤄 나가기 위해서는 결국 기술의 자립화가 관건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줍니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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