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한국프로야구의 큰 별이 졌다. 1980년대 마운드를 평정했던 최동원이 향년 53세로 14일 세상을 떠났다.
최동원은 한화 코치로 재직하던 2007년 대장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병세는 크게 호전된 듯 했다. 2009년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 감독관으로 그라운드를 지켰고 TV 프로그램 등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나 지난해 건강은 급격히 악화됐고 포천 등지에서 요양생활을 하다 14일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최동원은 한국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다. 처음 이름을 알린 건 토성중학교 3학년 때다. 중학야구 예선전에서 9회말 2아웃까지 ‘퍼펙트게임’을 펼쳤다. 경남고 진학 뒤에도 승승장구는 이어졌다. 2학년이던 1975년 전국우수고교 초청대회에서 경북고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고 이튿날 열린 선린상고전에서 8회까지 기록을 이어나갔다.
가장 꽃을 피운 건 1976년 청룡기고교야구대회다. 특유 연투능력으로 고교 마운드를 평정했다. 대건고와 8강에서 삼진 10개를 빼앗으며 팀을 4강으로 이끈 그는 이어진 선린상고전에서도 삼진 11개를 잡아내며 팀에 1-0 승리를 안겼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앞선 승자결승에서 전국대회 최다 탈삼진 기록(20개)을 세우며 팀을 9-1로 승리를 이끈 최동원의 기세는 거침이 없었다. 훗날 홈런왕에 오른 김성한과 마운드 대결에서 삼진 12개를 챙기며 팀의 5-0 완승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당시 우승에 대해 그는 “동료 선수들에게 마지막 이닝이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란 걸 각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마지막까지 온 힘을 다해 투구한 것 같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해 가을 열린 한일고교야구대회도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다. 1, 2차전 두 경기에 나서 일본타자들의 방망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18이닝동안 최동원은 단 1실점만을 허용했다. 피칭은 위력적이고 노련했다. 초반 커브를 얻어맞자 이내 직구 위주로 패턴을 바꿔 상대를 제압했다. 당시 대표팀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전 SK 감독은 “지시에 따라 훌륭히 실력을 발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잇따른 호투로 최동원은 졸업 뒤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됐다. 연세대, 고려대, 동아대 등은 앞 다퉈 영입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러브콜은 대학에 그치지 않았다. 한일고교야구대회를 통해 진가를 발견한 가네다 마사이치 롯데 오리온즈(현 지바롯데 마린스) 감독은 양자 제의까지 건네며 입단을 타진했다.
최동원의 선택은 연세대였다. 바랐던 결과는 아니었다. 훗날 그는 “고려대에 가려고 했는데 모 기관에서 방해공작을 펼쳤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연세대 출신 유력 인사들이 나를 데려오기 위해 정치적 공작을 펼쳤다”고 밝혔다.
대학 재학 중에도 최동원은 숱한 제의에 시달렸다. 1981년에는 대륙간컵대회에서 최우수선수로 선정되는 활약에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구단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연봉 61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불거진 병역 문제로 해외진출의 꿈은 막판 결렬되고 말았다. 캐나다 수상까지 교민들의 진정서를 정부에 제출했지만 문을 열지 못했다.
결국 이듬해 최동원은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롯데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를 밟았다. 첫 해 성적은 기대 이하였다. 38경기에 출전해 평균자책점 2.89를 남겼지만 9승 16패 4세이브로 승보다 패가 더 많았다. 누적된 피로 탓이 컸다. 시즌 뒤 그는 훈련 강도를 높여 슬럼프 탈출을 노렸다. 400개 이상의 불펜 투구를 소화했고 다양한 기구를 이용해 몸을 만들었다.
피나는 노력은 결실로 이어졌다.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연투로 대변된다. 삼성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에서 그는 혼자 4승을 따내며 롯데에 창단 첫 우승을 안겼다. 시속 150km의 강속구와 폭포 같은 커브. 하지만 무엇보다 올드팬들을 홀린 건 싱싱한 어깨였다. 최동원은 ‘무쇠팔’이었다. 정규시즌에서 51경기에 출전해 27승 13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하며 체력을 소진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다시 한 번 전무후무한 연투능력을 뽐냈다.
1차전 선발로 나서 한국시리즈 사상 첫 완봉 및 완투승(4-0)을 챙긴 그는 3차전에서 삼진 12개를 잡아내며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롯데는 4차전과 5차전을 모두 내주며 2승 3패로 쫓겼다.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이 기댈 수 있는 건 최동원뿐이었다. 5차전에서 8이닝을 맡겼지만 6차전 5회 다시 한 번 그에게 마운드를 부탁했다. 최동원은 기대에 100% 부응했다. 남은 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팀의 6-1 승리를 견인했다.
이어진 7차전 역시 그의 몫이었다. 최동원은 체력 소진으로 난타당할 것이라는 야구인들의 전망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9이닝동안 4실점으로 틀어막으며 팀에 6-4 승리를 안겼다. 한국시리즈 5경기에서 남긴 성적은 4승 1패 평균자책점 1.80. 30년을 맞은 한국프로야구에서 이보다 더 강한 어깨를 자랑한 투수는 전무하다.
승승장구는 1986년까지 계속됐다. 1984년부터 그해까지 최동원이 챙긴 승리는 66번. 776.2이닝을 소화하며 무려 평균자책점 1.97을 남겼다. 그러나 강렬했던 불꽃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로 입성 8년 만인 1990년, 32살의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마운드를 비교적 일찍 내려온 건 지나친 연투 탓이 크다.
그는 1983년부터 1987년까지 5시즌 동안 200이닝 이상씩을 던졌다. 강병철 감독은 1984년 후반기 50경기 가운데 31경기를 그의 팔에 의존하기도 했다. 경남고 시절부터 에이스 노릇을 해 온 점을 감안할 때 짧은 수명은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최동원은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다시 태어나 투수가 된다면 ‘굵고 짧게’ 예전과 똑같이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다시 한 번 투수로서 기회가 온다면 넌 어떻게 할 거냐’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변화를 주지 않을 것 같다. 그게 최동원의 인생이니까”라고 말했다.
‘무쇠팔’의 생은 프로경력처럼 짧고 굵게 막을 내렸다. 최동원은 마지막까지 마운드를 서고 싶어 했다. 고인은 지난 7월 22일 허구연 MBC 야구해설위원의 권유로 경남고와 군상상고의 레전드 매치에 경남고 대표로 참석해 끝까지 더그아웃을 지켰다.
당시 수척한 모습에 많은 야구인들이 건강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많이 좋아졌다. 다음에는 꼭 마운드에 서겠다”며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걱정했다. 그리고 이는 공식석상에서 내놓은 마지막 말이 됐다. ‘불세출의 투수’는 끝까지 야구공을 놓지 않았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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