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준영 기자] 4일 사퇴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힌 김준규 검찰총장은 발표에 앞서 미리 준비한 '사퇴의 변'을 통해 "이번 사태의 핵심은 '합의 파기'에 있다"면서 "최근 국제회의장에서 웃으며 있었지만 속으로는 '간'이 녹아날 정도로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아래는 '사퇴의 변' 전문.
지난주 UN 세계검찰총장회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습니다. 수사권 합의안의 국회 수정의결로 인하여 힘든 상황이긴 하였으나,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전세계 검찰총장들이 모두 모인 국제회의를 주재하는 검찰총장으로서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길게 보면 우리나라와 검찰에 큰 자산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모든 일을 해낸 여러분들 또한 자랑스럽고 헌신적으로 수고한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라를 대표해서 국제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에서 당시로서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대신할 수도 없었고, 중요한 국제회의를 망쳐 국가적 위신을 손상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법사위 수정 의결이 있었을 때 이미 결심했습니다. 국제회의장에서 웃으며 있었지만, 속으로는 ‘간’이 녹아 날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이번 사태는 대통령령이냐 법무부령이냐의 문제라기보다, 사태의 핵심은 “합의의 파기”에 있습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일단 합의가 이루어졌으면 그대로 이행되어야 합니다. 합의가 깨지거나 약속이 안 지켜지면 책임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장관들과 검찰총장, 경찰청장 등 중요 국가기관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최고 국가기관 내에서 한 합의, 그리고 문서에 서명까지 해서 국민에게 공개한 약속마저 안 지켜진다면 우리나라에서 과연 어떠한 합의와 약속이 지켜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약속이 파기된 이러한 사태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고, 또한 이런 일이 그대로 넘어간다면 향후 차세대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겠습니까? 법 또한 ‘약속’입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대학에서 법을 배운 이후 검사 생활 30년 동안 변함없이 간직한 ‘법언’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Pacta Sunt Servanda(팍타 순트 세르반다)” 지켜지지 못할 합의라면 처음부터 해서도 안되고, 합의에 이르도록 조정해도 안되었고, 그럴 합의라면 합의를 요청했었어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합의가 파기되면, 이를 어긴 쪽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검찰총장인 저라도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결과적으로 이행되지 않은데 대한 책임이라도 지겠습니다. 합의가 깨어지면 얼마나 큰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법’집행을 담당하는 국가기관의 합의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 수사권 합의는 검찰이 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수십년간 계속된 국가기관간의 소모적인 갈등을 끝내고, 범죄척결에 힘을 모으자는 뜻에서 경찰에 수사개시권을 부여하는데 합의한 것입니다. 합의 이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에게 “합의에 대한 책임과 평가는 제가 지고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후배 검사들이 사표를 내고 사의표시를 한 진정한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수고하고 지친 후배들이 책임질 일이 아닙니다. 검사들은 공직자로서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국민들만을 바라보고, 국민들과 생각을 같이 해야 합니다. 크게 양보한 합의마저 파기된 현실이 원망스럽겠지만, 겸허한 자세로 국민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국회의 의결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모든 책임은 검찰총장 한사람으로 충분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사퇴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퇴임전 검찰총장의 마지막 권한행사로 여러분들의 사직서와 사퇴의사를 모두 반려합니다. 우리 검찰과 검사들은 본연의 업무에 전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대검 중수부를 비롯하여 전국에서 진행중인 저축은행 관련 비리수사를 철저히 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찰에서 진행되는 모든 수사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특히 저축은행 비리 수사에 대해, 국민들은 모든 것이 밝혀지길 원합니다. 끝까지 수사하고 끝장을 봐주길 바랍니다
수사지휘는 형사절차에서 ‘법’과 ‘법의 지배’가 어느 단계에까지 미치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법경찰과 수사기관은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합니다. 통제 없는 수사의 진행은 국민들의 생활과 재산, 그리고 신체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다행히 국회의 의결을 거친 새로운 형사소송법에 따라 “모든 수사는 검사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경찰이 진정 사법경찰의 수사권을 원한다면, 먼저 자치 경찰, 주민경찰로 돌아가 시민의 통제를 받고, 사법경찰을 행정경찰에서 분리시켜 국민들에 대한 보호장치를 먼저 만든 후에야 논의할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역사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갈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모든 일은 국민의 뜻에 따라야 하고, 검찰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섬기는 자세로 일해 달라는 것입니다. 임기가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총장직에서 사퇴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후배들에게 민망스럽습니다.
특히,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세계검찰총장회의에 직접 오셔서 축하해 주셨고, 나라와 검찰을 생각해 주시고 검찰총장의 위상을 세워 주시려는 말씀까지 해 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특히 중대 국사를 위해 해외출장중인 상태에서 부득이 이런 발표를 하게 된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때를 놓칠 수는 없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국민들의 여망이 매우 높습니다. 성공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퇴임식은 동계올림픽 평창유치가 확정되는 기쁜 소식이 온 뒤에 잡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이 모습을 담담히 지켜봐주시는 검찰가족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준영 기자 foxf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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