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희준 기자]디폴트(채무불이행) 선언이 논의되는 그리스와 관련해 최근들어 자주 등장하는 말을 꼽자면 헤어컷(hair cut)즉 원금 탕감이 있다. 그리스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으니 원금을 줄여달라는 요구다. 채권자들이 원금 탕감을 해주면 그리스는 당장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만 앞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다는 점에서 최악의 선택이 된다. 그리고 다른 채무 국에도 피해를 준다.
◆그리스 요구하는 부채 탕감이란 =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대해 채권자가 빚을 갚도록 하기 위해 선택하는 채무조정에는 원금 자체를 줄여주는 부채 탕감과 만기연장, 이자율 인하, 추가대출 등이 있을 수 있다. 만기연장이나 이자율인, 추가대출은 원금을 그대로 둔채 숨통을 좀 터줘서 채무자가 빚을 갚도록 하기 위한 유인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채권자는 이자율 등은 조금 손해보겠지만 그래도 채권은 챙길 수 있는 방안이다.
이에 비해 원금 탕감은 빚의 원금 자체를 줄여주기 때문에 채권자가 손해를 더 많이 본다. 채무자가 시쳇말로 “배째라”고 버티니 어쩔 수없이 원금을 줄여줘서 나머지라도 받기 위해 고육지책인 셈이다.
◆헤어컷은 대학살,스캘핑으로 끝날 것=그리스가 부채탕감을 선택한다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다시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생각을 말아야 한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그리스 국채에 대한 유럽 은행들의 익스포져(노출액)은 2010년 말 기준으로 520억 달러(2010년 말 기준) 인데 이중 독일은행이 230억 달러로 가장 많고 프랑스 은행이 150억 달러로 두번째로 많다. 독일은 대부분 국영은행과 펀드 몫이어서 프랑스가 가장 많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특히 소시에테제네랄(SG)과 크레디트아그리꼴(CA)은 그리스 은행에 대해 지배지분을 갖고 있어 자회사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원금 탕감 결정이 나면 당장 이 은행들은 신용등급 강등을 감수해야 한다. 대출 회수에 나서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도 이 은행들은 다시는 그리스 정부나 그리스 은행과 기업에 대출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 은행과 기업이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리려한다면 ‘초고금리’를 물어야 할 것이다. 원금 탕감 혹은 떼먹기에 가하는 당연한 처벌(페널티)이다.
문제는 후폭풍이 그리스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채권은행들은 아일랜드,포르투갈,등 다른 나라 채권을 매각에 손실을 축소하려 들 것이다. 우니크레디트(Unicredit) SpA의 페데리코 기쪼니(Federico Ghizzo) 최고경영자(C대)는 지난 16일 비엔나에서 기자들을 만나 “1년간의 논의끝에 소득없이 헤어컷을 결정한다면 그다음날 시장은 아일랜드와 포르투갈 및 기타 국가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헤어컷은 머리털을 깎는 게 아니라 머리가죽을 벗겨 죽이는 ‘스캘핑’(scalping)임이 드러날 것이다.
◆국제금융계는 채무보증 선호= 현 단계에서 국제금융계도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한다. 악셀 베버 전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의 말에서 그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악셀 베어 전 총재는 27일(현지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채무에 대한 유럽의 보증(개런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그리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채무 해결에 대한 괄목할 만한 ‘거래’가 있어야 한다”면서 “디폴트를 선언하거나 ‘헤어컷(채무탕감)’, 채무에 대한 정부의 보장 등 3가지 옵션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베버 전 총재는 “개런티 지급은 민간 채권의 자발적인 참여를 효과적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그리스 국채를 다량 보유한 유럽은행들이 인센티브 없이는 롤오버를 거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 보증은 이들의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BNP파리바 등 프랑스 은행들은 올 중반부터 2014년 중반까지 만기를 맞는 그리스 국채 상환금 가운데 70%를 재투자하기로 합의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50%는 30년 만기 신규 그리스 국채에 투자하고 나머지 20%는 양질의 증권으로 구성된 펀드에 재투자한다고 통신은 전했다. 당초 채권단은 5년 만기 채권으로 차환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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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털깎기 논란피하기 어려워=민간은행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채무에 대해 정부가 보장해야 한다는 방안에 대해 “은행들의 이익을 지나치게 보장한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양털깎기’를 한 은행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양털깎기’(Fleecing of the Flock)란 양의 털이 자라는 대로 뒀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털을 깎아서 수익을 챙긴다는 뜻으로 ‘화폐전쟁’(Currency Wars)의 저자인 중국의 쑹훙빙이 자산시장의 보이지 않는 메카니즘을 설명하기 위해 쓴 표현이다.
다시 말해 유럽 은행들은 그동안 그리스에 대한 신용대출을 확대해 사람들이 자산투자든 소비를 늘리게 한뒤 갑자기 대출을 회수하거나 억제해 가격폭락을 유도한다음 폭락한 자산을 헐값에 사들여 엄청난 차익을 거뒀는데 또 이익을 챙겨줘야 하느냐는 비판이다.
이는 그리스 채권에 고금리(수익률)를 물린데이어 독점 통신사와 전력회사 지분매각 등을 통해 그리스 국민들이 피땀흘려 쌓은 국부를 머지 않아 챙길 것이라는 점에서는 ‘양털깎기’가 진행되고 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의 142.8%(2010년 기준)에 이른 부채를 지고 있어 다시 빚을 내지 않으면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그리스에 돈을 빌려줬다가 떼일 가능성이 있는데 누가 대출하겠는가라는 반론도 있다. 다시말해 양치기가 주는 달콤한 사탕에 눈이 멀어 뒷날 털을 통째로 깎일 줄 꿈도 꾸지 못한 양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주장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양털깎기는 억울하지만 채무자가 과오나 실책, 불가피했던 일이든 무엇이든 자기가 저지른 행위(채무)에 대해 치러야 하는 대가 아닐까.
◆허리띠 졸라매고 국고 채우는 게 그리스의 급선무=지금 양털을 깎을 가위를 들고 다니는 양치기는 수없이 많다. 헤지펀드만 하더라도 2조 달러 이상의 자산을 운용하면서 고수익을 낼 투자 대상을 눈을 부럽뜨고 다니고 있다. 채권,환율, 주식, 상품 등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 투자한다. 이들은 ‘투기꾼 핫머니’와 ‘투자자’의 양면을 가진 자본일 뿐이다. 이들에게 양털깎기가 억울하다고 해봐야 돌아올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양털깎기를 당하지 않는 게 최선의 방안일 뿐이다.
그리스의 경우 국고를 채우는 게 급선무다. 이를 위해서는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 금리를 올려 은행 자본을 확충해해서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부터 갚아나가야 한다.
무엇보다 가계든 기업이든 빚으로 살 생각은 꿈도 꾸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국가 재정과 가계와 기업의 채무 구조조정을 단행해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한다. 이는 새출발을 위한 기본일 뿐이다. 선택은 그리스 국민에게 달렸다.
박희준 기자 jack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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