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대한 질문만 하실 거죠?” 열심히 작품을 찍었는데 개인사에 집중된 인터뷰라면 배우 입장에서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전에 이런 부탁을 받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중에서도 이요원은 지난 해 영화 <된장>을 홍보하기 위한 인터뷰를 “개인의 사생활에 대해서만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는 이유로 취소할 만큼 사생활 공개를 꺼리는 배우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 전 기대감보다 조심스러운 마음이 앞섰던 게 사실이지만, 인터뷰를 해보니 그것은 열심히 작품에 임한 배우의 자세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인기나 흥행에 연연하지 않았고 “고만고만한 애들이 나와서 예쁘게 사랑하는 트렌디 드라마가 당기지 않았”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뚜렷하고 확고한 이요원은 배우라는 타이틀만으로도 할 말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KBS <푸른 안개>부터 SBS <외과의사 봉달희>와 MBC <선덕여왕> 그리고 최근작 SBS <49일>까지 스스로 험난한 길을 택한 여배우는 어떤 마음으로 14년을 살아왔을까.
<#10LOGO#> 영화 <된장>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다음에는 내 나이 또래의 밝은 캐릭터를 하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생각이 반영된 결과물이 이번 <49일>에서 연기했던 ‘빙이경’인가?
이요원: 사실 캐릭터에 대해 자세하게 모른 채 1인 2역과 빙의라는 소재만 듣고 결정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몸만 빌려주고 남의 연기만 해주다가 끝날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밌을 것 같았다. 그동안 어두운 역할은 많이 해봤지만 송이경처럼 진짜 우울증에 걸리고 죽은 것처럼 사는 인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재밌게 촬영했다. 모험을 한 셈이다.
“고만고만한 애들이 나와서 예쁘게 사랑하는 게 별로 당기지 않았다”
<#10LOGO#> 신지현(남규리)과 송이경을 동시에 표현해야 했고 시간이 갈수록 미묘하게 캐릭터의 톤이 달라졌기 때문에 두 인물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했을 것 같다. 처음에 어떻게 접근했나.
이요원: 시놉시스를 통해 인물에 대한 역사도 보고 또 내가 상상을 해보면서 어느 정도 두 캐릭터를 잡고 갔다. 근데 난 촬영하면서 만들어가는 스타일이다. 너무나 다른 상황과 성격을 가진 인물이니까 작은 것도 다르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송이경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한 남자 때문에 저럴 수 있을까. 근데 어릴 때부터 고아원에서 가족처럼, 친구처럼 의지하고 지내다가 연인이 된 거다. 그러면 송이경한테 송이수(정일우)는 삶의 목표이자 전부인데, 그 아이가 갑자기 죽어버렸으니까 정말 따라 죽고 싶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LOGO#> 첫 회에서 신지현의 영혼이 빙의된 채 “나는 신지현입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에서 남규리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그 전부터 남규리의 목소리나 행동을 관찰했나.
이요원: 사실 내가 규리 씨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없는 게, 나는 중저음이고 그 친구는 되게 하이톤이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밝게 하다보니까 저절로 그런 목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아무리 신지현이라도 송이경의 몸에 들어갔기 때문에 송이경의 목소리나 행동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신지현과는 조금 다른 ‘빙이경’을 표현하려고 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규리 씨의 제스처나 버릇 같은 걸 많이 따라했고, 규리 씨한테도 내가 대사할 때의 습관을 알려주면서 중간에서 만나자고 했다.
<#10LOGO#> 후반부로 갈수록 한강(조현재), 송이수와 동시에 멜로를 촬영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것도 밝고 달달한 러브라인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애절한 사랑이었는데, 그런 부분을 동시에 소화하는 건 어땠나.
이요원: 감정적으로 힘들었다. 송이경과 송이수는 정말 사랑했던 사이인데, 사랑부터 안 나오고 아픔부터 보여주니까 계속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난 이 친구를 사랑한다, 이 친구의 좋은 모습만 보자. 이렇게 송이수에 집중하다가 갑자기 한강과 멜로를 찍을 때가 많아서 헷갈리기도 했다. 게다가 마지막까지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위해 산다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예전 작품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직업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것이 주된 스토리고 멜로가 사이드였다면 <49일>은 삶과 죽음, 멜로를 동시에 다루는 작품이었다.
<#10LOGO#> 방금 말한 것처럼, 멜로가 중심이 되는 로맨틱 코미디와 같은 트렌디 드라마는 거의 출연하지 않았다. 보통 2~30대 여배우들의 필모그라피에는 적어도 한 두 작품 있을법한데,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았던 이유는 뭔가.
이요원: 20대 초반에는 희한하게 트렌디 드라마가 그렇게 싫었다. 자꾸 정극만 쫓아갔다. 선배님들과 작품을 같이 하고 싶었고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배우고 싶었지, 고만고만한 애들이 나와서 예쁘게 사랑하는 게 별로 당기지 않았다.
<#10LOGO#> 이번 작품에서는 선배들한테 연기를 배우는 입장에서 벗어나 또래 혹은 후배들과 작업했는데, 어떤 경험이었던 것 같나.
이요원: 처음이라 좀 힘든 점도 있었다.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탁구 치듯이 호흡을 주고받아야 하는데, 선배님들과 연기할 때는 그 분들은 완벽하게 정답인 상태였기 때문에 나만 잘하면 됐다. 그러다가 이번에 신인 친구들과 연기를 하게 됐는데 ‘난 잘했으니까 넌 알아서 혼자 해라’ 이런 마인드는 또 안 되겠더라. 그렇다고 내가 다정다감하게 가르쳐 주는 스타일도 아니고. 대신 최대한 그 친구가 많이 끄집어낼 수 있게끔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계속 기다려줬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봐, 언니가, 누나가 다 받쳐줄게. 이번에 후배들이 나한테 고맙다며 좋은 선배라고 얘기하는 것도 다 이것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다.
“흥행과 시청률은 그냥 운”
<#10LOGO#> 처음 배우로서 주목을 받은 작품이 KBS <푸른 안개>였다. 정극이었고 상대 배우 이경영을 비롯해 선배들이 대거 출연했던 작품이었는데, 그 때의 경험이 확실히 도움이 된 것 같나.
이요원: 이 작품과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통해 기본적인 부분은 다 배웠던 것 같다. 사실 나이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역할은 경험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연기하면서도 감독님한테 잘 모르겠다고 했다. 당연하다고, 네가 어떻게 알겠냐고 하시더라. 그런 감정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 배우는 비슷하게라도 그 캐릭터의 감정을 느껴야지, 전혀 모르겠고 이해가 안 되면 그건 정말 연기를 하는 게 돼버린다.
<#10LOGO#> 20대 초반에 <푸른 안개>를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데뷔 시절부터 작품을 선택하는 것에 있어 겁이 없었나.
이요원: 일 욕심이 굉장히 많았다. 신인이었을 때는 작품을 선택하기보다 들어오는 것 중에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나한테 들어오는 대본은 다 소화해야 될 것 같았다. 다른 사람한테 주기 싫었다. 갑자기 여러 가지를 할 수 있게 된 상황이었으니까 그랬던 것 같다.
<#10LOGO#> 주로 어떤 부분에 끌려서 작품을 고르는 편인가.
이요원: 보통 캐릭터, 스토리, 감독님 이렇게 3박자가 다 맞아야 된다고 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보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캐릭터를 좀 많이 본다.
<#10LOGO#> 배우라면 인기나 흥행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부터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에 출연해왔다. 말 그대로 캐릭터만 고려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언제부터 그랬던 것 같나.
이요원: 처음부터 그랬다. 흥행과 시청률은 그냥 운이었다. 똑같이 밖을 돌아다녀도 드라마 전후의 반응이 달라지는 게 방송의 힘인데, 그게 또 금방 사라지는 게 현실이다. 시놉시스를 보면서 이건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오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작품에 출연한 적은 없다.
<#10LOGO#>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 같나.
이요원: 처음에 상업적인 작품으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작가주의 감독님한테 이 장면은 이래서 필요하고 이 동작은 이래서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그리고 시간은 정말 빨리 흐르고 나이도 금방 먹는데 계속 인기나 흥행을 기다리다가 시간을 보낼 바에는 그냥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그 때 그 때 일하는 재미를 느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LOGO#> 하지만 한 작품 한 작품 쉬운 게 없었다. SBS <패션 70’s>에서는 연기력 논란이 있었고 MBC <선덕여왕>에서는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현정이 맡았던 미실이라는 강력한 캐릭터가 더 주목을 받았기 때문에 오로지 작품 자체에만 집중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이요원: 안 흔들리려고 노력했는데 그렇다고 전혀 흔들리지 않을 순 없었다. 배우는 감정을 갖고 노는 직업인데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이 감정을 건드리니까 ‘난 아니야, 난 아니야’라고 생각해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바람을 하도 맞으면 익숙해지듯이 자꾸 그런 얘길 듣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무뎌졌다.
“내가 한 연기를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다”
<#10LOGO#> 그래서 그런지 예전보다 외적인 요소에 흔들리지 않고 좀 더 여유 있게 연기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요원: 편하게 했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거 다 한 것 같다.
<#10LOGO#> 마음먹은 대로 잘 나온 것 같나.
이요원: 너무 피곤해서 놓친 몇몇 장면을 빼고는 만족스럽다. 그건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니까. (웃음) 내가 내 눈빛을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나한테도 드디어 저런 눈빛이 나오는구나, 조금씩 발전하고 있구나. 희열을 많이 느꼈다.
<#10LOGO#>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뚜렷한 신념을 갖고 시작했는데, 그게 가능하려면 본인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지 않나.
이요원: 어렸을 때부터 내 자신, 내가 가야할 길을 깨달았다. 나에 대한 확신은 그 때부터 있었다.
<#10LOGO#> 너무 일찍 깨달았다는 것에 대해 아쉬운 부분은 없나.
이요원: 반반이다. 잘했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생각이 뒤늦게 왔더라면 이것저것 많이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10LOGO#> 15년 가까이 일관된 길을 걸어오면서 결국 배우로서 보여주고 싶은 건 뭔가.
이요원: 그냥 내가 한 연기를 보고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으면 좋겠다. ‘내가 저랬는데’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낀다. 이번 작품에서도 송이경이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여자의 눈빛과 상황이 자신과 너무 똑같아서 공감이 가고 자꾸 보게 된다는 글을 봤다.
<#10LOGO#> 그렇게 공감을 얻기 위해 앞으로 더 채우고 싶은 게 있다면.
이요원: 감정이다. 그 나이에 맞는 연기를 보여주는 게 제일 좋은데, 이제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줘야 할 때다.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면 간접적으로나마 책도 읽고 많이 돌아다니면서 사람들도 만나고 그들의 인생 얘기도 들어보고.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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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이가온 thirteen@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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