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말 서울에서 아버지가 딸을 목 졸라 죽이고, 어머니마저 장도리로 내리쳐 살해하려한(살인 및 존속살해미수)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지난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417호 법정에서는 7명의 배심원들을 앞에 두고 검찰과 변호인이 공방을 벌였습니다. 검찰은 피고가 된 아버지를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변호인들은 죄를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재판 내내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습니다. 독자 여러분이 배심원이라면 어떤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누구나 불시에 배심원으로 불려갈 수 있습니다. 이날 배심원 자격으로 진지하게 판결을 내린 7명도 평범한 대학생, 주부, 직장인, 자영업자였습니다. 법은 "만 20세 이상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고, 특별한 자격은 필요하지 않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법정에서 보고 들은 그대로 지면에 옮겨봤습니다. 아시아경제 독자 여러분의 현명한 판결을 기대합니다.
[아시아경제 박현준 기자] 딸 보미(16ㆍ가명)의 몸이 축 늘어졌다. 보미를 올라타고 목을 움켜쥐고 있던 김철현(42ㆍ가명)씨는 손을 풀었다. 딸이 이제 죽었다.
잠시 뒤 숨이 트이자 보미는 다시 깨어나버렸다. 저항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빠 잘못했어요." 김씨는 못 들은 채, 몸을 올라타고 두 손으로 목을 더욱 졸랐다. 딸은 버둥거리다 팔로 김씨의 어깨를 할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김씨의 어머니 최씨가 한마디했다. "자는 애 귀찮게 말고 나둬라" 잠시 후 보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죽었다.
김씨는 이어 방 한켠에 놓여있던 장도리를 꺼내들어 어머니 최씨에게 다가갔다. 최씨는 방이 답답하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김씨는 장도리를 최씨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쳤다. 강한 충격에 장도리 머리 부분이 날아가고, 피가 벽으로 확 튀었다. 최씨가 "아이고, 아이고, 내게 왜 그러느냐"며 쓰러졌다. 김씨는 웅크린 최씨의 목을 졸랐다. 최씨의 몸은 더 빨리 풀려버렸다.
김씨는 텔레비전에 연결된 유선방송용 케이블을 떼어내 둥글게 말았다. 그만 죽으면 모든 일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줄을 옷걸이에 걸고 목을 매었다. 정신은 곧 혼미해졌다. 그러나 눈이 뜨였다. 천장을 바라보고 쓰러져 누워 있었다. 케이블 줄이 끊어져 자살에 실패한 것이다. 그제서야 아까 마신 소주의 취기가 올라왔다. 흑백영화처럼 딸과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일이 눈 앞에서 그려졌다. 김씨는 방을 나가 마을 인근의 대모산에서도 자살을 하려했지만 실패했다.
김씨의 인생이 처음부터 꼬인 건 아니었다. 유복한 1남2녀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모자란 게 없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았다. 가세가 기운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였다. 그래도 성격에 그늘이 지진 않았다. 욕창에 걸린 아버지를 보살펴드렸다. 효자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누워서 7년을 보내다 돌아가셨다. 1993년에 초등학교 동창과 결혼해 딸을 낳았다. 서울 강남세브란스에서 보미가 첫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남자와 눈이 맞은 아내가 김씨의 이름으로 카드를 발급받아 돈을 물쓰듯 했다. 결국 이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딸 보미는 김씨가 기르기로 하고, 아내가 진 빚 7000만원 역시 그가 떠맡았다. 1995년이었다.
김씨는 벌이가 괜찮다는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그러나 2003년에 돌아와야했다. 어머니 최씨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어서다. 어머니의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화장실을 다녀오면 대변을 벽에다 닦았다. 의사는 '치매 말기'라고 진단했다. 최씨는 밖에서 낙엽, 쓰레기 따위를 주워 집에 들고왔다. 약 값이 많이 들어갔다. 동네를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도 딸 보미가 잘 참아줬다. 할머니가 길을 잃고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전해들으면 학교를 조퇴하고 할머니를 찾아 데려왔다.
보미는 가수를 하고 싶어했다. 김씨는 보미를 강남에 있는 음악 학원에 보냈다. 공부를 썩 잘하진 못했지만 딸 얘기를 할 때 그는 즐거운 표정이었다. 주변에는 "딸이 실용음악을 한다"고 자랑했다. 보미가 속을 썩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얼마전 연예인을 하겠다고 연예기획사에 들어갔다가, 사장의 꾐에 빠져 잠자리를 한 것이다. 보미가 어두운 표정으로 이런 고민을 털어놨을 때 김씨는 충격을 받았지만, 그래도 딸을 다독이고 위로했다. 김씨의 생활은 말그대로 적자였다. 신촌 게임장에서 매니저로 일하며 170만원 정도를 받았다. 서울 개포동의 보증금 300만원짜리 8평 임대 아파트비의 월세로 44만원을 내고나면, 나머지는 보미 학원비와 어머니 치매 치료비로 지출했다. 거기에 더해 매달 60만원이 빚갚는 데 들어갔다. 사기를 저질러 진 5000만원 빚을 갚기위해서다. 김씨는 2년의 실형을 선고 받고 1년 이상을 복역하다 사면받았다.
손에 쥐는 돈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살림을 꾸려나가던 지난 12월1일 아침, 이 모든 게 터졌다. 그는 전날 보미를 크게 꾸짖었고, 보미는 반항했다. 딸이 남자친구를 사귀면서 문란하게 논다는 걸 알아서다. 사이가 좋던 딸과 다투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즈음 직장도 잃었다. 회삿돈 2000만원을 가로챈 게 들켜, 소송을 걸겠단 통보를 받았다. 어머니 치료비 등으로 들어가는 돈을 감당할 수 없어 사채를 빌리고, 그게 점점 불어나 갚을 수 없게 되자 회삿돈을 빼돌려 쓴 게 화근이었다. 낙담해 소주를 마시는 김씨 앞에 어머니가 쓰레기 더미를 가져왔다. 밖에서 주워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그에게 쓰레기를 "먹자"고 했다. 음식과 쓰레기를 더 이상 구분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렇게 살아서 뭣하는가.
"어머니, 우리 다 아버지 곁으로 갈까?"
"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아버지 이 근처에 계셔?"
김씨는 그 말에 결심을 굳혔다. 낳아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딸과 함께 죽겠다고. 그리고 잠 든 보미의 목에 죽음의 손을 가져갔다.
박현준 기자 hjunpark@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