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다문화가족 20만명 시대가 머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다문화가족은 현재 17만명에 육박한다. 중국 조선족과 한족 외에 베트남과 필리핀 출신이 가장 많고, 특히 결혼을 위해 이주한 여성으로 생겨난 다문화가족이 대다수다. '코리안 드림(Korean Dream)'의 환상을 안고 한국에서 제2의 삶을 살고 있는 수십만의 다문화가족. 생소한 언어와 판이한 문화, 경제적 궁핍 속에서 저마다의 가정을 꾸리고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꿋꿋이 살아가면서도 늘 고향을 방문하는 꿈을 꾸는 다문화가족을 위해 제주항공과 여성가족부 위탁 기관(전국다문화가족사업지원단)이 손을 잡았다. 제주항공의 마닐라ㆍ세부 등 필리핀 2개 노선 신규 취항을 기념해 특별히 마련된 다문화가족 고향 방문 지원 프로그램. 그 감동적인 현장을 본지 기자가 이틀 동안 함께 했다.
치매母 "넌 누구냐?" 한마디에 눈물 왈칵.."가족 있어 그래도 웃죠"
제주항공 필리핀 취항 기념 다문화가족 고향 방문 지원
남편ㆍ두딸과 함께 찾은 고향 한자리 모여 가족의 情 나눠
[마닐라(필리핀)=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지난 24일 오후 필리핀 마닐라로 첫 취항을 앞둔 제주항공 비행기에 오르기 전, 인천국제공항에서 얼굴을 마주한 델마 C. 베게라(33) 씨 가족은 기자가 밤낮으로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제주항공의 도움으로 6년 만에 겨우 친정집에 가게 된 델마 씨의 가족을 처음 만나면 어떤 말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 지 고민과 걱정이 많았던 것이 사실. 하지만 그들의 티 없이 순수하면서도 지나치게(?) 해맑은 표정은 편한 마음을 안고 동행 취재 길에 오를 수 있었던 힘이자 남모를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끈끈한 정이 됐다.
◆어느덧 10년 "고향 그리는 사이, 제주도 사람 다 됐어요"=필리핀 출신 델마 씨는 제주도에 산 지 올해로 10년째다. 지난 2001년 말, 18살 많은 남편 송진웅 씨와 결혼해 슬하에 두 딸(송유경ㆍ송유진)을 뒀다. 남편은 생활 가전 수리공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영어 강사와 펜션 청소를 하면서 벌이를 하는 델마 씨는 이번 친정 방문을 위해 펜션 일을 포기했다. 한국에 사는 동안 고향에 딱 한 번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부모님을 꼭 뵙고 싶어서였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필리핀 말로 향수를 나눌 수 있는 이웃사촌이 많이 생겼지만, 화상 통화로 부모님 얼굴을 가끔 볼 수 있었지만, 비싼 비행기 삯으로 엄두를 못 낸 고향을 드디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델마 씨는 지난 고된 삶이 잊히는 듯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2학년 맏딸 유경은 남편 송 씨를, 올해 7세인 막내 유진은 델마 씨를 빼닮았다. 마치 해외여행을 가는 양 들뜬 아이들은 비행기 창가 자리다툼을 하고 기자의 스마트 폰이 궁금한 어린 철부지였지만 서투른 엄마의 한국말을 되잡아주는 속 깊은 마음과 순수한 눈망울을 지녔다. 이륙 후 4시간여가 지나고 드디어 필리핀 야경이 드러나자 유경은 "마이너스 한 시간의 나라다"며 엄마의 고향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나타냈다.
◆"넌 누구냐" 한 마디에 참았던 눈물 '펑펑'=밝은 분위기는 델마 씨가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반전됐다. 마닐라 시내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에 위치한 델마 씨 친정집은 6년 전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다소 침울했다. 밤새 달려 동틀 무렵 도착한 집에서 델마 씨를 반갑게 맞은 건 그녀와 꼭 닮은 막내 동생 뿐.
깡마른 체격의 친정어머니는 델마 씨를 보고선 "너는 누구냐"며 초점 없이 경계심 가득한 눈빛만을 보냈다. 첫 만남부터 줄곧 환한 미소가 가득했던 델마 씨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6년 만에 재회한 엄마는 치매를 앓고 있어 끝내 딸을 알아보지 못 했다. 무의식 중 모성애가 남아선지 딸의 곁을 맴돌 뿐이었다.
올해 78세인 친정아버지는 청각 장애가 있는데 최근 폐가 나빠지면서 거동이 힘겨울 정도로 쇠약했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 한 두 차례 겨우 일어나 약만 복용한다. 노쇠한 부모님과의 감격에 겨운 뜨거운 포옹은 볼 수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델마 씨는 "너무 슬프다. 속상하다"를 반복해 뱉었다.
이내 슬픔을 뒤로 하고 델마 씨 형제자매는 한자리에 모여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때론 한바탕 웃고, 때론 함께 눈물지으며 따뜻한 가족애를 나눴다. 남편 송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내 고향 상황이 좋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내달 만기가 돌아오는 적금으로 시집 올 당시 저당 잡혔던 논을 꼭 되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정 파탄 위기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오네요"=화목한 델마 씨 가족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다름 아닌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10여년 전 한국에 온 델마 씨는 한국어를 배울 만한 여건이 안 됐다. 델마 씨는 "당시에는 국제 결혼자를 위한 한국어 교육 시스템이 없었고 남편과의 대화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두 딸이 자라면서 의사소통은 큰 문제가 됐고 델마 씨는 '죽기 아니면 살기' 각오로 한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델마 씨와 같은 결혼 이민자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점으로 언어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을 꼽는다는 일반적 통계가 피부로 와 닿았다.
델마 씨 가족은 지난 6년 동안 고향 집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매번 서류 심사에서 탈락해 눈물로 아쉬움을 달랬던 델마 씨.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터라 감동은 배가 됐다.
남편 송 씨는 "필리핀에 들고 온 짐꾸러미에는 오래 전부터 마련했던 선물 중 포장지가 빛바랜 것도 있다"며 "뜻하지 않은 이번 기회가 너무 감사하다"고 전했다. 제주항공은 앞으로 1년 동안 델마 씨와 같은 다문화가족을 매달 선정해 필리핀행 왕복 항공권 등을 지원한다.
마닐라(필리핀)=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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