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2>현대그룹 아산 정주영②
1965년 국내 건설업계 최초 해외공사 수주
日조선소 돌며 사업준비 현대중공업 일궈
현대車 '포니 신화' 도전정신·끈기의 승리
$pos="C";$title="";$txt="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항상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 부를 국내로 끌어 와야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국내 건설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해외공사를 수주했으며, 1986년 처음으로 국내 차를 미국 시장에서 판매하기 시작하는 등 고인의 개척정신은 오늘날 '글로벌 현대'의 밑바탕이 됐다.";$size="550,427,0";$no="2010020313294212281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아시아경제 손현진 기자]"한국 경제는 세계 기업과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 밖의 부를 긁어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기업은 세계 시장에 나가 경쟁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누가 더 많은 개발ㆍ투자를 할 수 있고, 누가 더 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으며, 누가 보다 훌륭한 조직을 갖고 있느냐가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 이길 수 있는 첫째 조건이다"
아산(峨山)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사고는 국경에 얽매이지 않았다. 19살의 나이에 단 돈 70원을 쥐고 상경해 자동차 제조업과 건설업의 기틀을 마련한 그는 빠르게 눈을 해외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에게 해외 시장 진출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자 국부를 창출해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될 수 있는 필수적인 과업이었다. 때문에 그는 경영진에게도 항상 넓은 해외에서 치열하게 경쟁해 시장을 개척하고 수출을 늘려야 한 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1963년 베트남 호치민의 상수도 시설 공사 국제 입찰을 통해 '해외 전진' 을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비록 수주에는 실패했지만 건설업의 경우 해외에 진출하지 않으면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정 회장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이후 또 한번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절치부심한 끝에 마침내 1965년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대한민국의 건설회사가 처음으로 해외건설시장에 진출한 사례로 기록됐다.
$pos="C";$title="(사진 다시!!!!!/창업주)";$txt="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시찰 중인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에서 두번째). 이 공사는 국내 건설회사가 처음으로 해외 공사를 수주한 사례다. 고인은 보다 큰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했다.
";$size="550,503,0";$no="2010020315251444801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2차선 도로의 길이는 98km, 공사기간 만 30개월, 공사비 522만 달러의 대규모 공사였다. 공사 도중에 경험부족, 기후 등 예상하지 못한 변수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정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관 속에서 축적한 노하우와 경험은 '할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을 더욱 키웠다. 태국을 시작으로 정 회장은 알래스카 협곡 교량 공사, 괌의 주택 및 군사 기지 건설, 파푸아뉴기니 지하 수력 발전소, 베트남 캄란 군사 기지 건설, 메콩 강 준설 공사 등 을 연이어 수주했다.
1976년 마침내 그는 중동 진출에도 성공하게 된다. 1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던 1975년 그는 일찍이 중동 진출을 결심했다. 정 회장은 앞서 울산조선서를 건설해본 경험으로 바레인의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를 수주해 성공적으로 공사를 마쳤다. 한 번의 성공은 연이은 수주로 이어졌다. 결국 정 회장은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쥬베일 산업항 공사, 해군의 육상 및 해상기지와 주택전용 항만공사를 따냈다.
정 회장의 해외 시장 개척 사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6년 현대건설 이춘림 상무와 느닷없이 일본 조선소를 방문한 정 회장은 '해외에서 큰 배를 주문 받아 만들면 큰 돈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이시가와지마 하리아 중공업의 요코하마 조선소와 가와사끼 중공업, 고베 조선소까지 둘러본 그는 '당장은 어렵겠지만 차례차례 준비하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바로 일을 추진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은 육지에서 하는 건축공사를 수상에서 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중공업의 시작이다.
문제는 당시 그에게는 조선소를 건립할 자금이 없었다는 것. 몇차례 자금 조달에 실패한 그는 1971년 영국 런던에 있는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찾아가 주머니에 있던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거북선입니다. 우리에게는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든 실적과 두뇌가 있습니 다. 다만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졌으나 잠재력은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이 말에 마음이 동한 롱바톰 회장의 도움으로 정 회장은 조선소 건립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고 1972년 3월 울산 조선소 기공식을 가졌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끈기, 순발력이 만들어낸 결실이다. "어려울 때일수록 진취적인 기상과 용감한 모험심, 불같은 열정으로 부단히 노력해 극복하고 배운다. 창업의 근본은 '낙관적인 사고'와 '자신감'이다"라는 그의 말 뒤에는 이 같은 경험이 뒷받침돼 있다.
$pos="C";$title="(사진/창업주)";$txt="1985년 포니엑셀 신차 발표회장을 찾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포니엑셀은 현대차에서 처음으로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생산한 차량으로 1986년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size="550,374,0";$no="2010020315291573982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또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포니'다. 1976년 1월 현대차에서 처음으로 자체 생산한 국산차 포니는 같은 해 처음으로 에콰도르에 수출했으며 1984년 캐나다에 진출했다. 이후 1985년 미국 현지 법인을 설립한 현대차는 1986년에는 마침내 '엑셀'로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미국 시장에 입성한다. 현대차가 미국에 처음 진출한 1986년 20만3291대였던 판매량은 지난해 43만5064대로 두배 이상 늘었다. 또 수출국도 1986년 70개국에서 지난해 200여개국으로 세배 가량 늘었다. 이제 현대차는 글로벌 시장 점유율 5%가 넘어서는 세계 5대 자동차 업체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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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진 기자 everwhit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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