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비밀 도청조직 미림팀의 도청 사실이 언론에 공개된 이래 143일간 숨가쁘게 진행된 '안기부ㆍ국정원' 도청 수사가 14일 중간 발표로 사실상 마무리됐다.
국가 정보기관의 무차별적인 도청 실태를 낱낱이 파헤쳐 문명사회의 추한 이면을 드러내고 국민 인권이 제자리를 찾도록 일조했지만 1997년 삼성의 불법 대선 자금 지원 의혹 등을 속시원히 밝혀내지 못한 점은 이번 수사의 한계다.
공소시효의 장벽에 막혀 도청의 원조 격인 안기부 인사들은 면죄부를 받고, 국정원 인사들과 이를 보도한 언론인들만 사법처리돼 형평성 논란을 낳은 점도 아쉬운 대목이다.
◇ 베일 벗은 불법 감청=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 산하 비밀 도청조직인 미림팀의 활동 실태가 7월21일 한 언론에 보도되면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불법 감청의 실체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참여연대가 같은 달 26일 X파일에 등장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 등 20여 명을 대검에 고발함으로써 의혹을 파헤치려는 작업이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검찰은 서울중앙지검에 사건을 배당해 황교안 2차장검사를 필두로 공안부와 특수부 검사 16명ㆍ수사관 50여명으로 구성된 수사진을 편성해 본격 수사에 돌입했다.
검찰은 불법으로 얻은 증거는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른바 '독수독과론'을 의식해 X파일에 나타난 삼성의 불법 자금 전달 의혹 규명에 앞서 일단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도청 행위 자체에 수사의 초점을 모았다.
◇ '사상초유' 국정원 압수수색 = 검찰은 수사 초반인 7월27일 미림팀장 공운영씨의 경기도 분당 자택을 전격 압수수색해 274개의 불법도청 테이프와 녹취록을 압수했다.
안기부 시절 불법 도청의 명백한 증거가 나오자 국정원은 8월5일 자체 조사결과를 발표했고 이 자리에서 불법 도청이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 계속된 사실이 처음 공개됐다.
8월19일에는 국정원에 대한 사상 초유의 압수수색을 벌여 휴대전화 감청장비인 카스(CAS)의 사용신청목록을 압수함으로써 휴대전화도 도청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줬다.
이후 검찰의 압수수색으로 국정원의 불법도청 정황이 뚜렷해지면서 도청에 관여한 국정원 인사들이 줄줄이 소환됐다.
공씨로부터 도청테이프를 반납받아 소각한 이건모 전 감찰실장과 천용택 전 국정원장이 소환됐고 오정소ㆍ황창평ㆍ박일룡 전 안기부 차장에 이어 김영삼 전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도 검찰에서 미림팀의 도청 정보를 보고받았는지 추궁당했다.
10월에는 국민의 정부 국정원 고위 간부들이 잇따라 조사대상에 올랐다. 김은성ㆍ이수일 전 차장에 이어 이종찬ㆍ임동원ㆍ신건 전 원장이 검찰에 나와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 무더기 사법처리= 수사 초기 미림팀장 공운영씨와 도청 테이프로 삼성에 돈거래를 제의했던 박인회씨가 구속 기소돼 1심에서 각각 징역 1년6개월과 징역 1년 2개월ㆍ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지만 안기부 도청 책임자들은 대부분 공소시효가 지나 사법처리를 면했다.
그러나 공소시효가 남은 DJ 정부 시절 국정원 간부들은 사정이 달랐다.
김은성씨는 10월6일 구속 기소돼 1심을 앞두고 징역 5년이 구형됐다. 특히 김씨가 지난달 14일 첫 공판에서 임ㆍ신 두 전 원장이 조직적ㆍ계획적인 불법 감청을 자행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사실을 폭로하면서 검찰은 곧바로 이들에 대한 영장 청구를 결정했다.
이들에 대한 공소장에서 김영삼 전대통령 등 정ㆍ관ㆍ경제ㆍ언론계를 망라한 국내 주요 인사 1천800명이 무차별 도청당한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지난달 20일에는 이수일 전 국정원 국내담당 차장이 자살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도청 수사는 한동안 주춤했으나 대검의 진상조사 결과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없었다는 쪽으로 결론나면서 다시 탄력을 받았다.
검찰은 국정원 도청 실태 외에도 안기부 시절 도청 실태, X파일에 담긴 삼성의 불법 정치자금 전달 의혹, 도청 내용 유출 등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하고 이날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143일간의 대장정을 마감했다. /AKN=Y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