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 소송' 참여 안해도 배상?…집단소송제 '혼합형' 모델로 가야[집단소송 도입되나]③

모든 피해자 배상하는 미국식 집단소송
도입 시 재계 '소송 남발' 우려
참여 의사 표현한 소비자에게만 배상하는
유럽·일본식 제도 혼합해야
증권 외 분야 대폭 확대는 필요

우리나라의 현행 집단소송제는 주가조작, 허위공시 등 증권 관련 사건에만 적용되고 소송 절차와 요건이 너무 엄격해 실효성이 없는 만큼 집단소송제의 범위를 넓히고 절차와 요건도 완화해야 한다는 데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주요국 중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소송제를 운용하고 있는 미국식 제도는 소송 남발 우려가 큰 만큼 그대로 도입하긴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전문가들은 다수 피해 손해 양상이 비교적 획일적인 사건에만 미국식을 도입하거나 유럽처럼 소비자 단체가 피해자를 대신해 소송을 벌이고, 판결을 통해 기업의 책임이 확정되면 그 이후 소비자들이 소송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하는 등 우리나라에 적합한 한국형 집단소송제를 제대로 설계해야 한다고 밝혔다.

집단소송제 가장 활발한 미국은 ‘소송 천국’

집단소송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지는 미국에서는 소비자 보호 효과만큼이나 부작용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일부 로펌들은 소비자의 집단소송을 부추기며 집단소송을 ‘영업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뉴욕 민사 사법 연구소(New York Civil Justice Institute)의 2021년 보고서를 보면, 2015년부터 2023년까지 뉴욕 연방 법원에는 화이자, 이베리아 푸드 등 주요 기업을 상대로 한 허위·기만적 광고 관련 소비자 집단소송이 700건 이상 제기됐다.

특히 2012년 설립된 ‘리 소송 그룹’이라는 미국 로펌은 2015~2018년 뉴욕에서 제기된 소비자 집단소송의 약 5분의 1을 담당했다. 미국 내에서는 리 소송 그룹 같은 로펌이 집단소송 시장에 뛰어들면서 소송 건수가 급증했고, 법원 시스템이 과부하 상태에 놓이거나 변호사들이 거액의 합의금만 챙긴다는 우려도 잇따른다. 미국 기업들 사이에서는 집단소송을 피하려는 각종 ‘꼼수’도 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주요 기업들이 소비자가 인지하기 어려운 약관에 “분쟁은 개별 중재로 해결한다”는 문구를 삽입해, 집단소송 제기를 원천 차단하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옵트아웃(제외신고형, 소송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의사를 밝힌 당사자에게만 확정판결 효력이 미치지 않는 방식)이 핵심인 미국식 집단소송제는 피해자 권리 구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강력한 수단으로 평가되지만, 소송 남발로 인한 기업 경영 부담과 제도 오·남용 우려도 동시에 제기된다. 이에 국내 법조계에서는 미국식 ‘옵트아웃 집단소송’을 그대로 도입하기보다, 유럽 등 여러 국가가 시험 중인 다양한 집단소송 모델의 장점을 결합한 ‘한국형 집단소송제’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 나온다.

미국식 집단소송 그대로 따르기보단…한국형 집단소송 설계해야

26일 쿠팡 개인정보 유출 사건 공동소송을 이끌고 있는 이은우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미국식 집단소송에 대해 재계의 거부감이 큰 상황에서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한국 현실에 맞는 혼합형 모델을 설계해 실용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다수 피해가 발생해 손해 양상이 비교적 획일적인 사건은 옵트아웃 방식으로, 개별적 손해의 특수성이 큰 사건은 옵트인 방식(피해자가 집단소송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한 경우에만 판결의 효력이 미치고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제도) 기준을 나눠 도입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모든 사건에 대해 옵트아웃 방식의 집단소송을 도입할 경우 소송 남발에 대한 기업 우려가 커질 수 있는 만큼, 사건 유형에 따라 참여 방식을 달리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반드시 미국식 방식을 그대로 도입하기보다는, 유럽 등 주요국에서 실험 중인 제도 가운데 장점을 모아서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과 일본에서는 소비자자 단체가 피해자를 대신해 소송을 벌이고, 판결을 통해 기업의 책임이 확정되면 그 이후 소비자들이 소송에 참여하는 식의 제도를 설계해 운영하고 있다. 이때 소송에 참여할 피해자의 의사결정 방식(옵트타웃, 옵트인)은 나라마다 제각각이다.

이 변호사는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대신해 소송을 벌일 주체를 제한하되 가급적 많은 단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변호사는 “일본의 경우 집단소송을 할 수 있는 소비자단체를 전국에서 4개만 허용하고 있다”며 “이처럼 소송 수행 자격을 극소수 단체로 제한하면 기업 등과의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어 (집단소송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사실상 작동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 “환경·에너지·기후·소비자 보호 등 전문성을 갖춘 단체라면 비교적 폭넓게 소송 대리를 허용하고, 소비자를 대신해 손해배상 청구까지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집단소송 도입 영역, 증권 외 분야로 확대해야

집단소송의 적용 범위는 대폭 넓혀야 한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증권이나 개인정보 침해 사건에 국한하지 않고, 공정거래법상 담합 피해나 소비자보호법 위반 등 집단적 피해가 반복되는 영역까지 집단소송을 허용을 대폭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기업의 불법행위로 대규모 피해가 발생해도, 집단소송이 증권 분야에만 제한된 탓에 국내 소비자들이 배상에서 소외돼 왔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집단소송을 도입하되 기존 제재·구제 수단과의 관계를 정교하게 조율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집단소송을 도입할 경우 과징금이나 단체소송 등 기존 제도의 역할을 재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박소영 국회 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징벌적 손해배상, 과징금 등 다양한 제도가 병존하는 구조에서 집단소송까지 더해질 경우 동일한 위법행위에 대해 제재가 중첩될 수 있다”며 “각 제도는 개별적으로 필요성이 있지만, 중첩적으로 작동하면 기업에 과도한 경제적·법적 부담이 부과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박 조사관은 집단소송을 통해 피해액이 충분히 배상이 된다면, 공적 제재 수단인 과징금의 필요성은 줄어들 수 있다고 봤다. 집단소송은 손해배상 규모의 대폭 확대를 전제로 하는 만큼, 징벌적 손해배상이나 고액 과징금과 병행될 경우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옵트아웃 방식의 집단소송을 도입할 경우, 피해자가 자신의 권리 행사 여부를 충분히 인지할 수 있도록 고지·통지 절차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미국처럼 우편·전자통지·언론·온라인 광고 등 다양한 수단을 활용해 판결 효력과 제외신고의 의미를 명확히 알려, 재판의 기판력(확정판결에 부여되는 구속력)으로부터 배제될 기회를 가져야 한다.

증거 확보가 관건…디스커버리 제도 검토해야

집단소송제 도입과 함께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 소비자 구제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소송 당사자 간에 증거와 정보를 상호 교환하도록 의무화한 절차다. 재판 전에 문서·증언·물적 증거 등을 미리 확보할 수 있도록 해 재판 과정에서 당사자 간 정보 비대칭을 줄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나라 민사소송에서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어 있지 않고, 민사소송은 법원이 증거조사를 주도하는 구조여서 정보 비대칭 문제가 지속해서 제기되어 왔다. 법원에서 자료를 요구하는 문서 송부 촉탁, 문서제출명령 등 제도가 있지만, 원고의 증거수집 권한에 대해 법원이 소극적으로 인정하는 경향성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의 증거가 기업에 있는 만큼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을 더 보장할 수 있도록, 민사소송 전반이나 (그것이 어렵다면) 집단소송에 한해서라도 디스커버리제도가 도입돼야 할 필요가 있다” 고 했다.

세종중부취재본부 세종=이은주 기자 golden@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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