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스토리]집단소송, 피해자 구제 vs 기업 책임

쿠팡 사태로 도입 논의 재점화
기업 책임 강화·부담 확대 공존
옵트인 방식 등 절충안 고민해야

최석진 로앤비즈 스페셜리스트

3300만개가 넘는 고객 계정 개인정보가 유출된 '쿠팡 사태'를 계기로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가 재점화됐다.

집단소송은 동일한 원인으로 피해를 입은 다수의 피해자 중 일부가 소송을 내서 이기면 판결의 효력이 모든 피해자에게 적용되는 제도다.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증권 분야에 한해 집단소송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엄격한 요건과 복잡한 절차 때문에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집단적 금전배상 제도가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과 스위스, 튀르키예 등 3곳뿐이다. 그런데 스위스는 금전배상 청구권 양도가 허용돼 사실상 집단소송의 효과를 달성할 수 있고, 튀르키예는 침해 중지 외에도 위법 확인, 장래 침해 예방 등 광범위한 금지 청구가 가능하다. 반면 우리나라 소비자보호법과 개인정보 보호법상 단체소송은 위법 행위의 금지·중지 청구만 허용하고 있다. 사실상 OECD 국가 중 '꼴찌'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국내에서도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7년 집단소송제 도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뒤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적극적인 도입 추진을 예고한 바 있다. 21대 국회에서 10건이 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임기 만료로 폐기됐고, 22대 국회에도 5건의 집단소송법안이 발의돼 있다. 2020년에는 법무부가 집단소송법 제정안을 입법 예고하기도 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최근 "집단소송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집단소송이 소액·다수의 피해자 구제에 효율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건 기업 입장에서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쿠팡 사태의 경우 현재 10여곳의 로펌에서 소송비용 수준의 수임료만 받으며 원고들을 모집하고 있지만 참여 인원은 전체 피해 고객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 피해자가 소송 참여의 기회비용을 고민하며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집단소송이 가능했다면 일부 피해자들이 소송을 내 승소하면 약 3370만명의 피해자 중 '재판 결과에 구속되지 않겠다'는 제외신고를 통해 옵트아웃(Opt-out)한 피해자 외 모두가 배상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1인당 10만원의 배상액만 인정돼도 쿠팡은 수조 원을 물어내야 한다.

지난 15일 열린 집단소송 관련 세미나에서 한 분쟁조정위원은 "집단소송 시스템이 마련돼 있어야 분쟁조정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차피 소송으로 갈 생각에 조정안을 거부하고, 피해 구제에 소극적이었던 기업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뀔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집단소송제 도입을 통해 기업의 책임성을 강화하고 재발 방지를 유도할 수 있다는 낙관론도 있지만 "옵트아웃과 징벌적 배상 제도를 갖춘 미국식 집단소송이 도입되면 기업이 망할 수도 있다"는 기업들의 포비아(공포증)도 이해가 간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달 말 발행한 현안 분석 보고서에서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제재 및 구제 수단과의 조정'을 집단소송제 도입의 전제 조건으로 들었다. 기업의 과중한 부담을 고려할 때 공적 제재인 과징금보다 민사 손해배상을 통한 사적 집행이 더 적합한 경우 과징금을 부과하지 않는 식의 조정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는 만큼 재판이 일정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혹은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 나머지 피해자가 참여할 수 있는 옵트인(Opt-in) 방식의 채택도 고려할 만하다. 중요한 건 피해자의 신속한 구제와 기업의 책임 간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이다.

사회부 최석진 로앤비즈 스페셜리스트 csj0404@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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