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업이 인공지능(AI)을 도입했다고 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웠다. 보도자료 제목에 AI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주목을 받았고, 투자자 설명회에서 AI 전환을 언급하면 질문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를 쓴다는 말은 더 이상 설명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본값에 가깝고 이제 중요한 것은 도입 여부가 아니라 도입 이후 무엇이 달라졌는가다.
요즘 몇몇 미국 기업들을 보면 흥미로운 변화가 하나 감지된다. AI 기능을 더 붙이기보다 오히려 줄이거나 통합하는 움직임이다. 예를 들어, 모든 서비스 화면에 챗봇을 배치하던 흐름에서, 핵심 업무에만 제한적으로 남기는 방식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겉으로 보면 후퇴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이를 정리의 단계라고 부른다. 실험의 시기를 지나 선택의 시기로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이 흐름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AI 워싱'이다. 구체적으로는, 실제 성과와 무관하게 'AI 기반' 'AI 드리븐' 등과 같은 표현만 덧붙이는 현상을 말한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 마케팅 과장이 아니라는 점이다. AI 워싱은 조직 내부의 판단력을 흐린다. '우리는 이미 AI를 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는 순간, 더 중요한 질문이 사라진다. 이 기술이 정말 필요한가, 지금 이 업무에 적합한가, 그리고 누가 책임지는가라는 질문 말이다.
미국의 한 기업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AI를 더 잘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더 적게 쓰기 시작했다." AI가 할 수 있는 일을 늘리기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먼저 정리했다는 뜻이다. 고객 응대, 내부 문서 요약, 의사결정 보조 등 여러 영역에 시범적으로 적용했던 기능 가운데 상당수를 제거했다고 한다. 사용률은 낮았고, 유지 비용은 예상보다 컸으며, 무엇보다 직원들이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다. 바로 전략이다. AI는 범용 기술이지만, 전략은 선택의 문제다. 모든 곳에 쓰일수록 강해지는 기술이 아니라, 적절한 곳에만 쓰일 때 조직의 판단을 돕는 도구다. AI를 붙였다는 사실보다, AI를 붙이지 않기로 한 결정이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하는 시점이 왔다.
모든 기능을 켜는 것이 아니라, 책임질 수 있는 지점에서만 AI를 남기는 선택, AI를 쓰는 것보다, 어디에서 멈출지를 결정하는 순간이 중요해졌다. 제미나이 생성 이미지
AI 워싱 이후에 살아남는 기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AI를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가 아니라, 왜 어떤 영역에서는 쓰지 않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가다. 왜 이 업무에는 사람을 남겼는지, 왜 이 결정은 자동화하지 않았는지, 왜 이 실험은 중단했는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조직만이 기술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 기업들도 같은 갈림길에 서 있다. AI를 도입했는가는 더 이상 차별화가 아니다. 도입 이후 회의가 줄었는지, 의사결정 속도가 달라졌는지, 책임의 위치가 명확해졌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보고서에 AI라는 단어가 몇 번 등장하는지는 의미가 없다. 조직의 작동 방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것은 도입이 아니라 장식에 가깝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더 많은 기능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를 판단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AI는 유행처럼 지나가지 않을 것이고, 이제 도입 여부를 논할 수 있는 선택지도 아니다. 시간이 갈수록 AI는 더 저렴해지고, 더 보편화하며, 더 깊숙이 조직 안으로 스며들 것이다.
그럴수록 경쟁의 기준은 기술 자체에서 점점 멀어진다. 모든 기업이 비슷한 수준의 AI에 접근할 수 있는 환경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을 자동화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끝까지 자동화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일관된 기준이다.
AI 워싱이 끝난 뒤 남는 기업은 AI를 가장 화려하게 도입한 기업이 아니라, 가장 차분하게 정리하고 필요할 때는 솔직하게 중단할 수 있었던 기업, 그리고 AI와 공존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의 원칙을 끝까지 유지한 기업일 것이다.
손윤석 미국 노터데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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