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슬기나기자
하루 새 국내 증시에서 한 그룹의 계열사 시가총액이 총 6500억원 이상 증발했다. 바로 "중복상장이 문제라고 생각하면 상장 후 주식을 사지 않으면 된다"는 구자은 LS그룹 회장의 발언이 그 불씨였다. 기업 총수가 고질적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꼽혀온 중복상장 문제를 두고 "작은 회사들이 계속 성장하려면" 불가피하다며 쉬운 자금 확보 수단으로 치부한 탓이다.
개미 투자자들의 실망감은 며칠이 지나고도 확연하다. LS그룹이 자회사 상장을 위한 주관사까지 선정한 만큼 단순한 설화로 여기지 않는 모습이다. 해당 발언이 공개된 다음 날인 지난 6일 LS그룹 계열사 9곳의 주가는 나란히 급락했다. 자회사 상장이 예상되는 LS ELECTRIC의 경우 당시 두 자릿수 내려앉은 데 이어, 4거래일 연속 하락세다.
구 회장의 말대로 중복상장이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요즘에 논란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주주 이익이 훼손될 수 있다는 투자자들의 우려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 LG화학이 배터리 사업을 물적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상장하자, 기존 LG화학 주주들이 큰 손실을 본 게 대표적이다. 카카오가 카카오페이·카카오뱅크를 잇달아 상장했을 때도 주가는 동반 하락했다. 모회사와 자회사의 가치가 분산되며 이른바 ‘중복상장의 덫’이 현실화한 사례들이다.
물론 자회사 상장 후 주가가 하락한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분가치 상승으로 이익을 얻는 기업 측과 달리, 소액 주주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 중복상장된 기업은 배당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모회사와 자회사 간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자회사 소액 주주들은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
국내 시장의 중복상장 비율(18.43%)이 유독 높다는 점 역시 논란의 배경이다. 미국(0.35%), 일본(4.38%), 중국(1.98%) 등 해외에선 중복상장 자체가 흔치 않다. 해외 투자자들이 중복상장을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보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특히 ‘소송의 나라’로 불리는 미국에선 소액 주주의 권리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중복상장 사례 자체가 드물다. 통상 스핀오프(Spin-off) 후 상장하곤 하는데, 이때 모회사는 기존 주주들에게 자회사 주식을 배당하는 방식으로 기업을 분리해 자회사가 독립 경영하도록 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베이와 페이팔이다. 가끔 모회사가 일정 지분을 유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지배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여기에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모회사와 자회사가 모두 상장될 경우 내부거래·이해상충 문제를 엄격히 관리한다. 자회사 상장 후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모기업에는 기업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을 문제 삼아 강력한 투자자 보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과거 중복상장 논란 당시 제재에 나서고도 실효성 비판을 받았던 한국 금융당국의 모습과 확연히 대비된다.
중복상장 발언을 둘러싼 이번 논란은 한국의 주주 보호 수준이 매우 낮음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하다. 물론 기존 사업 쪼개기가 아닌, 인수 기업의 상장 등을 계획중인 LS그룹으로선 앞서 논란이 된 중복상장과 사례 자체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에서 동일 선상으로 치부되는 게 다소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거나 ‘상장 후 주식을 사지 않으면 된다’는 총수의 발언을 개미 투자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는 또 다른 문제다. 더욱이 국회에서 주주 보호를 위한 상법·자본시장법 개정논의가 한창 뜨거운 현시점에 말이다.
중복상장이 기업 성장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주주의 신뢰를 흔들고도 언제까지 기업의 ‘성장’이 가능할까. 올해도 많은 기업의 중복상장이 예정돼 있다. 그리고 구 회장의 발언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주주 보호를 위한 법 개정을 더는 미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