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은주기자
국민연금 개혁 과제가 22대 국회로 넘겨지면서 그동안 논의된 여러 개혁 시나리오를 보다 면밀하게 검토해 한국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모델을 채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6일 국민연금 재정추계전문위원회의 제5차 재정추계에 따르면 2041년부터 국민연금은 적자로 돌아서고 2055년이면 국민연금 기금은 소진된다. 5년 전 재정 추계 때보다 소진 시점은 2년 빨라졌고, 적자 전환 시점은 1년 앞당겨졌다. 재정추계전문위원회는 인구 전망과 경제변수를 달리해 6가지 시나리오를 짜봤지만, 기금 소진 시점에 변화는 없었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2055년 뒤에도 안정적으로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현재의 국민연금 구조를 이대로 둬선 안 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다만 어떻게 연금의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를 두고선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21대 국회에서도 연금개혁특위의 여야 협상은 결국 불발됐다. 여야는 가입자가 내는 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올리는 데에는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재정 안정을 위해 소득대체율을 43%까지만 올릴 수 있다는 국민의힘과 노후 소득 보장을 위해 45%는 되어야 한다는 더불어민주당이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앞서 국회 연금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 의제 숙의단으로 선정된 시민 500명은 지난달 ‘더 내고(보험료율 13%까지 인상) 그대로 받아야 한다(소득대체율 40% 유지)’는 선택지를 최종 도출했지만, 정부는 재정 안정성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사실상 반대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연금개혁을 둘러싼 가장 대표적인 입장차이는 국회 연금특위 산하 공론화위원회가 시민 숙의단에게 제시한 두 가지의 선택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연금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중시하는 재정 안정론과 노후 소득 보장을 우위에 두는 소득보장 강화론이다. 양측의 입장은 다르지만, 한가지에선 생각이 일치한다. 현행 9%의 보험료율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만큼 보험료율을 어느 정도 올리는 ‘모수 개혁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조개혁은 장기간 논의가 필요한 만큼 일단 모수를 조정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데 있다.
차이점은 소득대체율을 어느 정도까지 올리냐에서 발생한다. 숙의 토론에서 제시됐던 ‘더 내고 더 받는’(보험료율을 9%에서 13%로 올리고 소득대체율도 40%에서 50%로 더 올리자는 내용) 안은 소득보장론자들의 논리를 대표하는데, 지금 예상하는 재정 우려는 지나치다고 본다. 국가가 저출산 고령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2055년에는 기금이 소진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소득대체율을 높여 노인 빈곤을 줄이고, 고령화된 미래에 내수 활성화에도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득보장론자들은 국민연금 기금이 소진되더라도 국가 재정을 투입해 해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고갈되면 그해에 필요한 지출을 그해 보험료와 국고지원으로 충당하는 부과방식으로 재정을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기금고갈 시점인 2055년에 약 26.1% 보험료를 부과해야 연금을 지급할 수 있지만, 국내총생산(GDP)의 1% 국고 지원이 이뤄지면 22.4%, GDP의 2% 국고지원이면 18.6%로 낮아질 수 있다고 추산했다. 또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릴 경우 2082년에 GDP 대비 국민연금에 지출하는 총금액을 2082년 최대 11.8%로 산출했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는 경우보다는 2.3%포인트 늘어나긴 하겠지만 이 정도 부담은 한국 경제 규모에서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는 논리다.
반면 재정안정론자들은 이런 추산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는 입장이다. 이들은 국민연금 지출액이 내년 GDP 대비 2.1%인 것을 고려하면 2082년 11.8%는 매우 큰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연금부족분을 재정으로 메꾸기 위해 드는 세금 또한 미래세대의 부담인 만큼 국고 지원은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향후 고령화로 의료비 지출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들은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50%까지 높이는 방식으로는 향후 노인 빈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과 빈곤 노인의 소득 개선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 빈곤 노인들은 국민연금의 최소 가입 기준인 10년을 채우지 못해 제도 바깥에 있거나 수급권이 있더라도 소득이 적고 가입 기간이 짧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득과 가입 기간이 연금액을 결정짓는 핵심 변수인 만큼, 소득대체율 인상의 효과는 직장 등에 소속돼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왔던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명목 소득대체율을 높이면 결과적으로 가입 기간이 긴 고소득 수급자들의 혜택으로만 집중된다고 본다. 이런 이유로 재정안정론자들은 소득대체율을 올리는 방안이 아니라,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영세 자영업자 같은 저소득 지역가입자들에게 보험료를 지원하는 등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소득보장론과 재정안정론자들은 입장이 다르지만 한 가지에선 생각이 일치한다. ‘우선 모수 개혁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구조개혁 없이 모수를 조정하는 것만으로는 기금 소진 시점을 조금 늦추는 것일 뿐 세대 간 형평성을 제고할 수 있는 안정적인 해법은 아니라고 비판했다. KDI 재정·사회정책연구부 이강구·신승룡 연구위원은 특정 시점에서 구연금을 정지 후 기대 수익비(가입자가 납부한 보험료와 이를 적립한 기금의 기대 운용수익의 합) 1을 보장하는 확정기여형(DC) 신 연금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KDI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구연금 계정으로 연금을 지급하다가 발생하는 재정부족분은 국가의 일시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구연금 기금 고갈이 예상되는 시점부터 약 13년간 GDP의 1~2% 정도의 재정 부담이 예상되지만, 2080년 이후에는 이 부담이 거의 사라질 것이라는 추산이다. 이 경우 기대 수익비 1을 목표로 하는 신연금에는 보험료를 15.5%까지만 인상하면 현재의 40%의 소득대체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KDI가 초점을 맞추는 건 기금의 안정성이다. 이 때문에 연금 재정 지급의 불확실성을 축소하려면 인구나 환경 변화에 따라 급여 지급액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방향으로 급여를 산정하는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현재는 가입 이력 등 근로 이력에 따라 받을 수 있는 급여가 미리 결정되는 확정급여형제도(DB)를 도입하고 있는데 신연금에는 수급액을 보험료, 운용수익, 기대여명 등에 따라 수급 개시 시점에 결정될 수 있도록 확정기여형(DC)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현행 제도보다 재정 안정성을 더욱 탄탄하게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보험료의 단계적 인상에 대한 거부감도 적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또 다른 구조개혁 제안도 있다.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제안했던 공적연금 통합안이다. 국민연금을 개혁하기 전에 공무원연금, 군인연금, 사학연금 같은 직역 연금부터 바꾸거나 형평성 차원에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공무원연금이 국민연금보다 더 유리한 구조로 설계돼 있기 때문에 이 문제부터 고쳐보자는 것이다. 현재 3개 특수직역연금은 보험료율과 급여 수준(소득대체율), 국가와 사용주의 부담 비율, 연금개시 연령 등에서 서로 다른 비율과 구조로 돼 있다. 이를 국민연금을 기준으로 일원화해 형평성을 맞추자는 제안이다. 그간 직역연금의 설계가 국민연금에 비해 유리한데다가 독일, 미국, 일본 등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볼 때 연금액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다만 공적연금 통합 과정에서 제도 개편 이전의 기득권은 인정하되, 개혁 이후에는 모든 공적연금 가입자는 가입 시점과 관계없이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입장이다. 각 연금의 가입자와 재정, 조직(국민연금공단, 공무원연금공단, 사학연금공단, 군인연금공단)을 합치자는 게 아니라 국민연금의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의 기준과 맞춰서 공평성을 높이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