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기자
국민연금제도에 대해 솔직하고 통쾌한 분석을 담은 책이 나왔다. 새 책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읽어볼 만한 국민연금에 대한 설명서다. '국민이 알면 정부가 싫어할 당신의 국민연금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관련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들을 위한 책이다. 현직기자와 정책전문가, 공학교수가 4년간 함께 고민하고 연구·분석한 사실과 자료들을 기반으로 국민연금에 대해 쉽게 설명했다.
책의 내용은 상당히 도발적이다. 국민연금이 불안하면 금융·보험회사들은 장사가 잘돼서 좋다. 공적연금에 대한 가입자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면, 사적연금 상품이 잘 팔린다. 정부가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에 지원하는 예산보다 사적연금 가입자에 대한 세제 혜택에 더 많은 재정을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됐다. 보험료가 25년째 9%로 묶여 있으니 직장인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부담하는 기업들은 부담이 커지지 않아서 좋다. 제도를 책임지는 정부 관료들은 국민연금과 상관없는 공무원연금 가입자라서 국민연금개혁이 이뤄지지 않아도 자신의 노후와는 상관없다. 결국 진정으로 국민연금을 돌보는 집단이 없다. 이 책은 '이렇게 중요한 제도를 왜 아무도 진심으로 신경쓰지 않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됐다.
국민연금은 상당히 복잡한 제도로 보이지만 핵심은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버지는 아들이, 아들은 그의 아들이 모시는 제도라고 생각하면 쉽다. 가족 내 노인부양의 원리를 사회적으로 넓힌 것이다. 가정은 자식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 일찍 사망할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노후에 대한 문제를 전체 사회구성원이 함께 준비한다면 훨씬 능률적일 수 있다. 이것이 사회보험제도이고 연금제를 시행하는 이유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돈을 받아야 할 노인인구는 예상보다 빨리 늘어나고 있는데, 돈을 낼 경제활동인구는 반대로 너무 빨리 줄어든다. 노인들은 약속한 연금을 못 받을까 봐, 젊은이들은 보험료가 너무 커질까 봐 염려한다. 연금제도에 대한 신뢰에 위기가 발생하면 보험이라는 판이 깨질 수 있다. 판이 깨지지 않도록 공정한 룰을 만들고 재정을 안정되게 끌고 갈 책임은 국가에 있다.
1988년부터 지금까지 정부는 열심히 보험료를 내면 그보다 많은 돈을 국민들에게 돌려드려 평안한 노후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해 왔다. 누군가 나서서 지금 이대로의 제도라면 이 약속을 더는 지키기 어렵겠다고 선언하려면, 자기의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한다. 2007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연금개혁에 실패한 원인은 정치적 모험을 걸겠다는 정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국민연금을 망치는 건 불신이라는 점이다. 국민연금 논란의 중심에는 연기금 고갈론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수치만 놓고 보면 근거 있는 얘기다. 하지만 저자들은 현대사회에서 공적연금의 파산을 염려하는 것은 국가가 망할 것이란 우려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외국 사례를 살펴보자. 현대 연금제도의 문을 연 독일의 경우, 제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천문학적인 물가 인상과 전쟁 자금 조달 때문에 그때까지 쌓아 놓았던 연기금 적립금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을 겪었다. 독일 정부는 이때부터 경제활동인구로부터 보험료를 거둬 곧바로 은퇴자에게 지급하는 부과식 연금을 정착시켰다. 부족한 재원은 정부 재정을 사용한다. 실제로 전쟁이 나서 국가 경제가 붕괴했지만, 연금제는 여전히 가동 중이다.
따라서 연금제도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전쟁이나 연금고갈이 아니라 가입자들의 제도에 대한 신뢰다. 특정 세대는 혜택을 받고, 어떤 세대는 보험료 폭탄을 맞는다면 제도는 존재는 위협받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재 국민연금의 가장 큰 문제는 신뢰 위기이며, 이런 위기를 조율할 주체들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점이 문제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정부를 필두로 국회와 연금전문가 누구도 눈앞에 보이는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국민연금이 개혁해야 할 우선 과제는 '개혁하지 못하는 체계'를 개혁하는 것이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책에는 정부가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았던 내용도 담겨있다. 2022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국민연금을 분석하고 검토 보고서를 발표했다. OECD는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에 국고를 지원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재밌는 사실은 정부가 국민연금에 돈을 써야 하는 이유인데, 그동안 한국 정부가 국민 복지 향상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을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떠안겨 왔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책은 현 상황에 대한 문제점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를 담은 현실적인 해법도 제시한다. 보험료 인상 폭은 사회적 약자들이 개혁과정을 버틸 수 있도록 국내총생산(GDP) 상승률보다 상당히 낮아야 하고, 한국의 경제 규모가 가장 크고 경제활동인구가 정점인 이때 정부 재정을 투입하자는 내용이다. 국민연금 자산의 절반이 국내에 투자된 상황에서 벗어나 장기적으로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 평가되는 국내 투자분을 해외 및 대체투자로 돌려 기대수익률을 높이자는 얘기도 포함됐다. 솔직하고 근거 있는 주장이다. 이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27개 그림과 18개 표의 정교한 분석자료들로 뒷받침한다.
저자들은 이렇게 글을 마친다. "기금이 고갈돼도 내 연금 받을 수 있어?"에 대한 답은 당연히 "그렇다"이다. 국민이 믿으면 없던 길도 만들 수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제도를 도입할 때 '국가의 약속'이라고 했다. 국민연금의 미래에 대해 '절대 쫄지말자 우리!'
국민을 위한 국민연금은 없다|유원중·원종현·김우창 지음|더숲|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