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수기자
‘별에서 온 그대’. 2013~2014년 인기를 끈 드라마다. 내용상 ‘외계인’을 뜻하지만, 실제 과학자들은 인류 모두가 ‘별에서 온 그대’라고 보고 있다. 인간은 물론 지구상 모든 생명체들을 구성하는 성분이 138억년의 우주 역사 속에서 별들이 탄생·성장·폭발·소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원소들이기 때문이다. 태양계에서 가장 오래된 태양조차 우주 초기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득한 먼 과거 어느 별이 폭발하면서 만들어진 수소·헬륨 원자들이 뭉쳐져 만들어졌다. 이처럼 원소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것은 우주와 생명의 역사와 본질을 알아내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물리학의 최대 과제다. 특히 가속기를 이용해 지구에 없는 희귀한 원자핵을 찾아내는 기초 과학 연구는 반도체·의학·신소재 개발 등에 활용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활발하다.
원소, 즉 원자는 전자와 원자핵(양성자+중성자)으로 구성된다. 전자와 원자핵 사이는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의정부만큼이나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그 사이는 텅 비어 있다. 원자핵을 이루는 양성자는 양의 전하를 띠어 원리적으로는 결합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양정자와 중성자와 전자기력보다 강력한 힘인 ‘핵력’으로 여러 개가 뭉쳐있다.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양성자 수로 원자번호를 정하며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결정한다. 또 양성자 수와 중성자 수를 합한 만큼을 원소의 질량으로 보고 있다. 양성자는 쿼크와 글루온으로 이뤄져 있다. 이 같은 원자의 세계는 나노미터(10억분의 1m)보다도 훨씬 더 적은 펨토미터(1000조분의 1m) 크기에 불과하다. 이런 팸토미터 세계를 탐사하는 도구가 가속기(accelerator)다. 전하를 띤 입자에 마이크로파(전자기력)를 쏴 가속하는 장치다. 입자의 종류(양성자 및 중이온·전자)와 형태(선형·원형), 전자기파의 종류(직류형·교류형)에 따라 구분된다. 이중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빛을 발생하는 장치로, 최근 주목할 만한 연구개발(R&D) 성과가 나오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SLAC 국립가속기연구소는 지난 12일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엑스선(X-ray) 레이저(선형 방사광 가속기)를 완성해 가동에 들어갔다. 화학 반응 순간 일어나는 원자의 움직임까지 포착해 초당 10만 프레임의 동영상을 촬영할 수 있다. 기존 방사광 가속기 LCLS-I(Linac Coherent Light Source)에 11억달러를 들여 LCLS-II로 성능을 개량했다. 엑스선 초당 펄스 수가 120개에서 무려 8000배 이상인 100만개로 늘어나 초당 10만 프레임의 동영상 촬영이 가능하다. 레이저의 밝기도 평균 1만배 이상 밝아졌다. 역대 최고의 선명도로 분자 운동을 촬영할 수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는 "화학 반응 도중 원자 주위를 맴도는 전자를 포함해 엄청나게 빠르게 일어나는 물질들의 운동을 이미지화할 수 있다"며 "광합성의 비밀을 밝혀내거나 컴퓨팅 시스템을 위한 새로운 전자 소자를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도 1994년부터 3~4세대 포항 방사광가속기를 완공해 활용하고 있다. 현재 충북 오창에 1조원을 들여 4세대 다목적방사광가속기를 구축하고 있다. 피코미터급으로 4GeV(40억 전자볼트)로 전자를 가속해 태양보다 약 1조배 밝은 광선을 생산해낼 예정이다.
우라늄 등 무거운 이온(중이온)을 가속해 새로운 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는 중이온 가속기(RAON)도 지난해 말 무려 1조5000억원을 투입해 1단계 저속 구간(빛의 속도 10분의1)을 완공했다. 앞으로 추가 연구개발을 거쳐 2030년대엔 고속 구간(약 초속 15만㎞)도 들어설 전망이다. 우주 탄생의 비밀은 물론 반도체·이차전지 등 화학 분야·바이오·의학 등에 활용될 수 있다. 최근엔 의료기관들이 중입자 가속기를 이용한 암치료 기술 도입으로 주목받고 있다. 탄소 이온을 빛의 속도로 가속해 암세포를 정밀 파괴하는 원리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지난 5월 첫 치료를 시작했으며, 서울대병원도 부산 기장군에 중입자가속기 치료센터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경주에서 운영중인 양성자 가속기도 있다.
가속기는 ‘노벨상 광맥’으로 불린다. 역대 노벨 물리학상 100여건 중 가속기 관련 연구가 20건이 넘는다.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면 곧바로 노벨상 후보 목록에 오른다. 이와 관련, 일본에서 최근 가속기를 이용해 사상 최초로 이론상으로만 존재했던 산소 동위원소(산소-28·28-O)를 관측하는 데 성공해 주목을 끌었다. 일본 도쿄공대 연구팀은 지난달 30일 네이처에 관련 논문을 게재했다. 산소(O2)의 원자핵은 양성자 8개와 중성자 3~18개로 구성된다고 알려져 왔다. 산소-28은 중성자 숫자가 20개나 되며 이번에 최초로 관측됐다. 특이한 것은 이렇게 만들어진 산소-28이 생성되자마자 붕괴해 버렸다는 점이다. 그동안 원자 구성에 대한 이론들과는 다른 결과였다. 과학자들은 원자핵 중 중성자 숫자가 2, 8, 20, 28, 50, 92, 126개 특정한 숫자(magic number·매직 넘버)일 경우 붕괴 기간이 긴 안정적인 원소라고 생각해왔다. 따라서 산소-28의 존재를 예측하고 관찰하려던 과학자들도 중성자 숫자가 20개인 ‘매직 넘버’에 속하는 만큼 반감기가 긴 안정적 물질일 것으로 예측했었다. 과학계에선 추후 입증이 더 필요하지만 기존 원자 구성 이론을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르는 혁신적인 내용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20’을 매직 넘버에서 삭제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가속기 연구도 시설·투입자원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긴 했다. 그러나 현장 연구자들은 미국 등 주요 강국들의 연구 투자·실적이 갈수록 강화되는 반면, 한국은 최근 예산이 급속도로 줄면서 후퇴 국면에 처해 있다. 한인식 기초과학연구원 희귀핵연구단장은 지난 14일 "RAON의 경우 1단계 저에너지구간만 완공됐는데 2단계 고에너지 구간이 없다면 노벨상 수상은 거의 불가능하다"면서 "세계 최초로 온라인 동위원소 분리방식(ISOL)과 비행파쇄방식(IF)을 모두 사용하는 방식이라 기대가 크지만 1단계 만으로는 ‘최초’ 발견이나 기존 연구 영역을 크게 확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포항 방사광가속기나 오송 다목적방사광가속기도 보다 앞선 선형 방식이 아니라 동적 관찰이 불가능한 원형이어서 한계가 있다. 원자력연의 양성자가속기도 100메가전자볼트(MeV)급으로 주요 강국들(500~3000MeV)보다 사양이 낮고 중성자 이용시설이 없어 개량 사업이 검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