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아내를 잃은 남편이 떠난 등대 여행

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1977년 자전소설 '흙탕물 강'으로 다자이오사무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이래, 서정적이면서도 정묘한 문장,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현대 일본 문단을 이끌어온 거장 미야모토 테루의 신작 소설이다. 소설 '등대'는 갑작스레 아내를 떠나보낸 뒤, 견딜 수 없는 상실감에 휩싸인 주인공이 우연히 등대 여행에 나서며 이를 통해 일상을 회복해나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간 진격하듯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며 삶의 의지를 되찾는 재생의 기록이자 서툰 남편, 무심한 아버지의 반성과 성장을 담은 따뜻한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

우리 주위에는 그런 일이 숱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아들, 몇 안 되는 친구.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나는 멀리서만 봐왔는지도 모른다. 삼각형도 육각형도 멀리서 보면 전부 원으로 보인다. 아니, 너무 가까워서 진짜 모습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206쪽>

고헤는 어쩐지 아쉬워 선뜻 떠날 수 없었다. 조금 더 그곳에서 백아白牙의 시리야사키 등대를 바라보고 싶었다. 안개 속에 서 있는 자못 우아한 자태가 한 인간의 기나긴 과거에서 온 이야기를 뿜어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죽인 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감정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 <301~302쪽>

“응. 그래도 얘기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왜요?”

“뭔가 소중한 것이 비눗방울처럼 터져 사라질 것 같아서.”

“소중한 것이 뭔데?”

고헤는 대답을 고민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는 왜 이리 많을까. <336~337쪽>

등대 | 미야모토 테루 지음 | 비채 | 391쪽 | 1만8500원

문화스포츠부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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