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정민기자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 이동하지 마라”
2014년 4월16일, 전남 진도군 앞바다의 세월호. 배는 기울어 시커먼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데 안내방송은 그러했다. 아이들은 떨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 마지막 메시지를 영상으로 남기는 아이들, 기도하는 아이들….
그들의 제주행 수학여행은 참혹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아이들은 차가운 바다에 빠졌다. 빛나던 청춘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어른들의 잘못된 대처는 10대의 안타까운 목숨을 그렇게 빼앗았다.
세월호 사고 소식은 충격이었다. 속보와 긴급 뉴스로 연이어 전달됐다. 서울 광화문에서도 부산 서면에서도 슬픔과 충격의 소용돌이가 이어졌다. 아이들과 수학여행 인사를 나눴던 안산의 학부모들은 어떠했겠는가.
그 충격과 참담한 심정은 단어 한 두 개로 표현할 수 없다. ‘제발 아이의 생명만은….’
가족들은 전남 진도로 달려갔다.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기적을 기원했다. 안산 단원고에는 촛불이 켜졌다. 아이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시민들의 촛불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 대구 광주에서도 마찬가지로 촛불이 이어졌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국민적인 기도와 염원, 그것이 하늘에 닿는다면 기적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 진도 앞바다의 거센 물살은 구조를 어렵게 했다. 그렇게 안타까운 시간은 지나갔다. 세월호에는 아직 남아 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다. 그러나 현실은 지옥이었다. 아이들은 함께 그 지옥을 경험했다. 일각에서 기대했던 에어포켓의 희망은 조금씩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아이들은 왜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그동안 어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한국 현대사의 충격으로 기억된 그 날, 정치권은 또 하나의 사투가 시작됐다. 책임론을 둘러싼 공방. 2016년 4월은 지방선거를 두 달 앞둔 시점이었다. 여야는 지역별로 광역단체장 등 후보자 선출을 이어가던 상황이었다.
세월호의 충격은 당연히 여의도 정가에도 충격파를 안겼다. 여야의 공직 후보자 선출 과정은 중단됐다. 여야 지도부는 그렇게 몸을 낮췄다. 세월호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은 정치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도 있었다. 서울시장을 꿈꾸던 정치인은 세월호를 둘러싼 아들의 SNS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개한 국민 정서’를 운운한 아들의 메시지는 세월호 충격에 빠져 있던 국민의 분노로 이어졌다.
세월호 승객 구조에 신경이 집중됐던 시기, 폭탄주로 구설에 오른 정치인도 있었고, 지지자들과 헹가래를 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가 뭇매를 맞은 정치인도 있었다.
세월호의 충격이 정치인에 관한 분노로 번지던 상황에서 이러한 돌출행동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붓는 효과로 이어졌다.
화룡점정은 청와대의 재난 콘트럴타워 해명이었다.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2016년 4월23일 대변인을 통해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청와대 책임론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세월호의 충격이 청와대로 번지자 진화에 나선 것인데 여론이 등을 돌리게 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적 불똥이 튀는 것을 막으려 애쓰는 모습에 국민은 충격에 빠졌다.
아이들을 사지에 내몰고 혼자 살아온 세월호 선장과 무엇이 다르냐는 지적도 나왔다.
제주도 수학여행을 꿈꾸던 아이들의 얼굴이 담긴 영정사진이 하나둘 늘어났다. 슬픔의 공유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2014년 4월 그날 이후, 아이들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사회의 약속과 다짐은 지켜졌을까.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호에 탔던 고등학생 아이들은 어느새 3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아직 살아 있었다면, 그랬다면…. 그 아이들은 9년 전 사회적 약속이 지켜졌다고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