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희기자
[아시아경제 이서희 기자] 필드 위에서 지인들과 내기를 즐기는 일은 흔하다. 점심 사기와 같은 소소한 내기는 라운드의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문제는 수 백만원에서 수 천만원까지 오르내리는 판이 벌어졌을 때다. 이 경우 자칫하면 도박죄가 적용될 수 있어 법리상 요건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법원 판례를 통해 필드 위 내기골프의 '도박' 여부 판단을 알아본다.
도박죄를 결정 짓는 핵심 요건은 ‘우연성’이다. 대법원 판단을 보면 도박은 ‘재물을 걸고 우연에 의하여 재물의 득실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주관적으로 당사자가 확실히 예견하거나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사정을 의미한다. 형법 제246조는 도박을 한 사람을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다만, 일시 오락 정도에 불과한 경우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내기 골프를 도박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당구·테니스·야구 등의 운동 경기의 경우, 우연이 아니라 당사자의 육체적·정신적 능력과 집중력 그리고 기량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므로 도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에 따라 실제로 하급심 법원에선 수억 원을 두고 내기 골프를 친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같은 사건을 두고 1심 판결을 뒤집는 판단이 대법원에서 나오면서 기류가 바뀌었다. 골프가 당사자의 기량에 많이 의존하는 경기긴 하지만, 경기자의 기량이 매 홀 내지 매 경기 일정하게 발휘될 것으로 추측하기 어렵고, 이에 따라 경기 결과를 확실히 예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게 당시 대법원의 판단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 백만원을 두고 내기 당구를 친 피고인들에게 도박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 판결도 있다.
당시 대법원은 “도박죄를 처벌하는 이유는 우연에 의해 재물을 취득하는 것을 금지해 정당한 근로의 대가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경제에 관한 도덕 원칙을 지키기 위함인데, 내기 골프의 상금 역시 정당한 근로에 의한 재물이 아니기 때문에 내기 골프를 방임하게 되면 경제에 관한 도덕적 기초가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우연성과 함께 도박죄를 결정 짓는 또 다른 요건은 ‘상습성’이다. 형법 제246조 2항은 도박 행위가 일시적이지 않고 상습적일 경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상습적인 도박 행위에 대해선 더욱 무거운 형벌을 둬 가중 처벌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도박과 일시적 오락을 나누는 기준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다. 내기의 액수와 횟수, 내기에 참여한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종합해 복합적으로 판단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는 “도박과 일시적 오락을 나누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면서도 “내기에 걸린 액수가 얼마나 큰지, 횟수가 얼마나 빈번한지, 내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지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해 도박죄 처벌 여부를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에게 몰래 약을 타서 먹이거나 타수를 고의로 속이는 등 거짓으로 내기를 해 재물을 취득한 경우엔 사기죄에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형법 제347조에 따르면, 사람을 기망(欺罔)해 상대방의 착오 있는 의사를 이용해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기타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는 경우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실제 지난 7월 지인에게 향정신성의약품인 아티반정을 먹인 뒤 내기 골프를 쳐 3억원가량을 가로챈 일당이 사기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 4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을 스크린 골프장으로 불러내 신경안정제를 커피에 몰래 타 피해자에게 먹인 뒤 판돈을 점차 올리는 수법으로 돈을 가로챈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엔 도박죄 적용 여부와 관계없이 사기죄 처벌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 사기죄의 경우 거짓말로 타인을 속였다는 점에서 도박죄보다 중범죄로 인식해 형량도 훨씬 무겁다.
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